나는 병원에서 나온다. 얼룩덜룩한 낙엽들이 보도블록 위로 쓰러져 있다. 참새 시체처럼 쓰러져 있다. 빛은 나무 사이로 자신을 던진다. 나는 병원에서 나와 내 머리를 붕대로 싸맨다. 머리에서는 피가 묻어 나온다. 하지만 닦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미미한 햇살이 날 만질 뿐이다. 낙엽이 날 스친다.
난 하나님을 수없이 찾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하나님을 욕하는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하루에 수백 번씩 들려왔다. 이 수치에 대해서는 전혀 과장이 없다. 나는 문자 그대로 머리를 때고 싶었다. 소리가 계속 들려 대리석 식탁에 머리를 박은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기도를 하라는 말에, 기도를 해 보았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교회당에서 혼자 기도를 하기도 하고, 지하철에서도, 집에서도 기도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런 확신도 가지지 못한 채, 공포와 절망 속에서 내 영혼을 무덤가에 내려놓아야 했다. 난 죽어가고 있었다. 난 죽어가고 있었다. 고작 스물셋의 나이에, 세상에서의 모든 소망을 쓰레기처럼 내려놓은 채, 깊은 우물로 빠져들고 있었다. 누구도 날 구원해 줄 수 없어 보였다. 난 하나님이 죄를 지은 나를 떠나셨다고 믿었다. 나는 괴로움을 시로 풀어냈다. 내 감정을 호소하는 도구인 시만이 날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해 십일월부터 이년 동안 거의 오백여 편의 시를 습작했다. 그 시절의 시를 보면, 내용이 암울하고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내가 썼던 <나의 아침 녘>이란 시를 여기에 기재한다. 매우 서툰 시라 부끄럽지만. 당시의 감정을 반영하는 데에 이 시를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약간의 수정을 가해 시의 일부를 올려본다.
언제나 어두운 나의 아침
암막 커튼을 쳐 놓은 창틈으로
조금씩 스치는 햇살
스치네 스치네 스치네
뺨 위로 뺨 위로 조금씩
텅 빈 방 안에 혼자 멍하니 앉아
캔버스 속의 형상들을 보네
내가 작년에 숲에서 그렸던
분명 그 그림인데
이젠 날 못 알아보네
빛보다 어둠에 더 익숙해진 내 눈동자
그림에서 형상들을 하나 둘 지우네
원래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흐릿한 형상들
눈을 감으면 터널 끝에서
흐릿하게 다시 생겨나는 형상들
어둠 밖으로 뛰쳐나가고픈
내 깊은 속마음
내 머리에 달라붙어
내게 속삭이는 괴물들
못 나가 못 나가 넌 못 나가
주저앉아 그대로 여기 주저앉아
네 흉측해진 몰골을 보는 거야
열두 시 세 시 일곱 시가 되도록 무력하게
나와 함께
그늘진 표정을 짓는 거야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한 시다. 나는 비슷한 분위기의 시들을 미친 듯이 써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양산 부산대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신경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으려고 입원을 결정했다. 상담도 병행했다. 그때 만났던 의사 선생님이 기억이 난다.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 내게 참 따뜻하게 대해 주셨는데. 성함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선생님께 내 그림 한 점을 선물했다. 또 내가 입원해 있을 때, 내게 문병을 와준 – 창원 XX대학의 - 한 선배가 있다. 십년지기 부산 친구들도 문병을 와주지 않았는데. 그 선배는 기꺼이 내 문병을 와주었다. 그 선배가 내게 공감해 주고, 날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삶의 모든 희망을 잃었을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내 아픔을 그림 속의 캐릭터 속에 녹여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캐릭터는 말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말을 아주 좋아했다. 어디에서나 자유를 향해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2020년 말 겨울,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린 그림이다. 원작은 아쉽게 찾지 못하지만, 사진 파일로 남아 있는 그림이다. 그림은 색연필로 그렸다.병원에는 이주동안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난 부산 기장으로 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시골 교회 목회를 그만두셨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을 칠 년 동안 살았던 함안을 벗어나 부산으로 돌아왔다.
스물넷 겨울에 난 어머니의 권고로 여행을 떠났다. 스물한 살 여름에 있었던 태국으로의 선교나, 스물두 살 여름의 오키나와행과는 또 다른 여행이었다. 나는 그때 내일로 패스를 처음으로 이용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군산으로 가는 표를 끊었다. 그리고 서울과 정동진으로 가는 표도. 전부터 들은 것이 있어서 정동진은 꼭 한 번 가고 싶었다. 열차는 무수한 논밭과 건물들을 지나 날 익산에 내려다 주었다. 나는 익산 시내를 한 시간가량 둘러보고 다음 기차를 탔다. 익산은 작은 도시였다. 서울과 부산에서 커다란 빌딩들만 보다가 익산을 봐서인지, 익산은 소인국처럼 느껴졌다. 익산에서 군산까지 직행이 있었는지, 군산 근처에서 다른 차를 갈아탔는지 명확하지 않다. 군산역에 내렸던 기억과 군산역에서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던 것은 기억이 난다. 나는 부산을 떠난 지 무려 일곱 시간 만에 군산에 도착했다. 군산은 내가 봤던 곳 중에 가장 이색적인 곳이었다. 높이 이 미터 가량의 집들이 대로를 따라 들어서 있는 그곳은, 일제 강점기의 색채가 많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가옥들은 일제 강점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가옥들을 개조하여 약국, 음식점, 카페들이 골목골목에 들어서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미곡 저장소로 쓰던 건물과, 세관이 있던 건물과 은행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을 돌아다니며, 백 년 전 군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더욱이 그때는 몰랐던 <탁류>라는 소설이 군산을 배경으로 집필이 되었다던데. 그 사실을 탁류 캐릭터들을 조형해 놓은 동상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나는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밤에도 군산항으로 나와 안개 낀 군산 시내를 구경했다. 군산 시내에는 거리 시작부터 끝까지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키 작은 집들을 지나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골목에는 백 년이 된 전신주가 서 있었다. 온 몸통과 머리에 쇠못이 박혀 있는 모습이 슬퍼 보였다. 꼭 머리에 질병을 앓고 있는 내 모습 같아 보였다. 난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잠시 동안 서 있었다. 그 후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군산 동네 안쪽까지 밤길을 따라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그 길을 따라서. 마음이 적적하고 쓸쓸했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나는 영상을 틀어놓고 잠을 청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게스트 하우스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로변에 서서 군산 시내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