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에 대한 기억

by 커피탄 리


그 산 정상에는 흰 억새가 춤을 추고 있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낸 여인의 모습처럼 쓸쓸하게 들바람에 휘날리고 있습니다. 산의 굽이진 능선을 따라, 산 이쪽에서부터 산 저쪽까지 여인들은 흰 치맛자락을 펄럭이고 있습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꺾어봅니다.
내 아버지가 날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화롭습니다. 산 정상에 올랐어도 내 마음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억새가 저렇게 황홀하게 춤을 추고 있는 데도요. 저들의 노랫말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바람이 억새 현을 스치면, 저들은 일제히 음정을 냅니다. 높고 맑은, 한편으로는 둔하고 진중한 음정을.
그 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파전과 도토리묵을 파는 장사가 있습니다. 목재를 이어 붙여 지은 작은 다방도 있고, 염소 농장도 있습니다. 가파른 곳을 올라올 때 들리던 메에- 하고 우는 소리가 꼭 여기에서도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 소리에 내 가슴은 침 바늘로 찌른 듯이 쑤셔옵니다.
X-Ray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그랬지요. CT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그랬지요. 다만 마음이 밝아지게 하는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그랬지요. 약의 흰색은 어딘지 그 산 정상의 억새를 떠올리게 합니다. 메에- 하고 울던 염소도 떠올리게 하고요. 그 산 정상의 하늘은 아주 맑습니다. 뭉게뭉게 피어난 흰 구름이 그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알록달록한 산 능선이 다 내려 보이는 꼭대기에 올라, 팔을 들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쓸쓸함도 내 마음을 좀 먹지 못합니다. 카메라에 포착된 그때 그 순간만큼은.
하지만, 그 산 정상에는 여전히 내가 웃고 있고, 여전히 내가 웃고 있고, 여전히 내가 웃고 있습니다. 함폭! 쏟아지는 눈을 맞아도 내 웃음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찬물을 삼킵니다. 흰 탄환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갑니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도 춤을 추고 웃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를 스케치합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흰 치맛자락과, 풀린 채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백자같이 허옇게 뜬 얼굴을 묘사합니다. 여인은 웃고 있습니다. 여인은 벼랑 끝에 쪼그려 앉습니다. 여인은 웃고 있습니다. 나는 여인이 되어 웃습니다.
벼랑 끝에서, 산 아래 아주 큰 마을을 내려다봅니다. 그곳에 나무는 자라지 않습니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멋진 구조물이, 나무대신 그늘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점차처럼 대로변을 지나다닙니다. 차들도 정신없이 도로를 질주합니다. 온갖 소음이 바흐의 음악처럼 피어오르는 사이에, 비명소리 한 줄이 실 올같이 솟아오릅니다. 그 목소리는 쉬고 쿰쿰한 향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발에 여러 번 짓밟힌 음정은.
X-Ray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그랬지요. CT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그랬지요. 다만 마음이 밝아지게 하는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그랬지요. 약의 흰색은 어딘지 그 산 정상의 억새와 염소를 여인과 흰 구름을 제게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