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산이 물먹은 안개에 잠기고, 검은 새 한 마리가 안개바다를 헤엄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천지사방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단 한순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줄고 불안에 떨어왔다. 인간은 모두 안갯속에서 산다. 안갯속에서, 저마다의 시야를 확보하려 분투한다. 손을 강시처럼 뻗고 안갯속을 헤매다가 타인과 부딪히기도 한다. 그럼 우리는 울거나 웃거나.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이란 마음이 정말 유연해질 수도 딱딱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계절에 따라서. 어떤 무리 속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유연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넓어진다는 것. 이제는 길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흐뭇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 마음이 딱딱해진다는 것은, 경직되고 닫히는 것. 어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 한 가지로도 마음이 몹시 어려워지는 것. 화를 내고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개인마다 다르다. 개인이 입은 상처의 정도에 따라.
누구라고,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라고, 자신만의 최악의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서로 불행과 행복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아픔이, 마음의 연육작용을 돕기도 한다. 그럼, 불쌍한 거지 아이를 보고서도 동정을 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아파봤는데. 너도 아프겠구나.’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가짓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보다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아이들 앞에서는 헤프게 웃고, 불쌍한 이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을 훔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이들은 어른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자식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줄 모른다. 부모가 자신에게 했던 그릇된 행위를 타인에게 답습한다. 하지만, 부모든, 형제든, 이웃이든, 사랑을 받아본 아이들은 다르다. 그 아이들은 받은 사랑을 전해 줄 줄 안다. 그렇다고 하여,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베풀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어머니가 늘 하신 말씀이 있다. ‘사랑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행복이라는 것이 뭘까? 인생이라는 것이 뭘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내 것을 더 가지기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일까? 행복은 작은 사랑이다. 왜, 어린 시절 받았던 소포 속의 작은 손 편지 같은 것 말이다. 서툰 글씨체와 엽서와 우표가 있는 작은 편지. 어른이란, 누군가에게 작은 손 편지를 먼저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안갯속을 거닐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어깨든, 팔이든, 다리든.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고, 아픔을 겪기도 했다. 사랑을 주기도 했고, 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이 이렇게 잔잔한 날. 사방이 안개로 뒤덮여 있고, 비가 슬슬 미끄럼을 탈 준비를 하는 날. 텅 빈 언덕 위에 올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축축한 공기를 차분하게 호흡할 수 있다면. 나는, 우리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