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스>로 보는 기독교
넷플릭스 시리즈 <바이킹스>는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 세력을 위시한(로마, 신성 로마 (프랑키아) 제국) 기독교 세력과 북해 건너편의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전신 부족과 왕국들)의 주민들이 믿던 오딘 신앙 사이의 거대한 전쟁 서사시이다. 서로 전혀 다른 두 세계관이 부딪힐 때,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낡은 국가 제도는 쓰러지고,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 스칸디나비아의 카테카트, 헤더비, 베스트폴과 같은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던 시대는 저물고, 하랄드 파인헤어 왕을 위시한 통일 노르웨이가 세워지는 한편, 노섬브리아, 동 앵글리아, 머시아, 웨섹스 등 고대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통치 시기가 저물고, 웨섹스를 중심으로 한 통일 잉글랜드의 깃발이 역사의 무대 위로 전면 등장한다. 바이킹의 첫 칩입(793년)으로부터 약 200년 뒤에 잉글랜드는, 크누트 대왕 통치시기에, 북해 제국에 편입되지만, 그들은 바이킹으로부터 그들의 기독교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싸워왔다. <바이킹스> 극 중에서, 카테카트의 여왕이 된 라게타가 ‘이건 신들의 전쟁이야. 우리 신은 기독교의 신과 싸우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두 세력 간의 전쟁은 종교 전쟁이었다. 종교는 사람들의 심장과 영혼 복판에 깊이 박혀 있는 화살촉 같아서, 단순히 ‘종교’라는 딱딱한 이름으로 명칭 하기엔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다. 종교 즉, 신앙은 사람들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믿느냐’라는 질문 속엔, ‘평소에 어떤 것을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 숨어 있고, 그 질문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느냐’ 즉, ‘당신 앞에 펼쳐진 세계가 어떤 모양이냐’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 질문들은 현대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니 신앙이 없는 세대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들은 종교의 옷을 입지 않았더라도 그 무언가를 믿거나 의지하고 있으니까. 여하튼, 앵글로-색슨 족과 노르드 족은 각자의 신앙을 위해 전쟁했다. 어떤 이는 신앙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신앙이 없거나, 어떤 이에게는 과도하게 넘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각자의 신의 날개 아래서 독자의 특이한 세계관을 형성해 온 사람들 사이에 타협점은 없었다. ‘공존’이란 없었다. 웨섹스에 정착하려는 라그나의 농부들을 죽인 에그버트(엑버트) 왕의 저의에도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세의 오경을 따른다. 가나안 족속과 섞이지 말고 통혼하지 말라던 여호와의 말씀 말이다. 드라마의 그 지점은 영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 장면은 아무런 설명 없이 진행된다. 설명 없이 라그나는 농사 지을 땅을 원하고, 설명 없이 에그버트와 아들 애설울프는 라그나의 정착민들을 살해한다.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는 이상한 장면이다. 분명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다. ‘현대식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면’ 안 되나요? 모두가 모두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안 되나요? 그 질문들은 어린애 같은 질문이다. 세계관이 다르다는 말은, 단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복잡한 이유들이 있다. 영적인 기류들은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지배한다. 그것이 섞인다면, 각 민족이 고수해 오던 모든 율법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1500년 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공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극 중에는 그 격렬한 지점 딱 중간에 서 있던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이킹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넘나들며, 자기 눈에 명백히 보이는 그 두 신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는 바위 뒤에 숨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신의 눈앞에 던지고 자신 앞에 펼쳐진 현실을 직시한다. 그 인물은 바로 린딘스판 섬의 수도승 애설스탠이다. 줄거리의 내용은 차치하고, 애설스탠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에 얽힌 다른 주요 인물들의 관점을 풀어내볼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끼리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공통점들에 대해서도 풀어나갈 것이다.
애설스탠과 라그나
두 사람은 약탈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의 신분으로 만나게 된다. 때는 793년 여름, 라그나가 이끄는 검은 까마귀 부대가 브리튼 북부의 노섬브리아 왕국을 침략할 때다. 드라마에서 그 침략은 역사상 최초의 잉글랜드 침략으로 그려진다. 라그나의 검은 까마귀 부대는 린딘스판 섬에 상륙, 린딘스판 수도원에 쳐들어가 그곳의 수도사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성인의 유골함 같은 진귀한 보물들을 탈취한다. 수도사 몇몇은 죽이지 않고, 노예로 팔 생각으로 끌고 가는데, 그중에 애설스탠이 있다. 라그나는 처음에, 애설스탠이 순전히 노르웨이 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그를 살려둔 것 같다. 애설스탠은 라그나 부부의 부재 시 라그나의 자녀들을 잘 돌봤다는 이유와, 또 라그나 가족이 해럴드슨 백작으로부터 쫓기던 때에 라그나 가족과 함께 했다는 이유로 신임을 얻고 노예의 신분에서 점진적으로 해방된다. 그는 바이킹의 기괴한 장례의식도 보고, 욜 축제, 그리고 자신이 제물로 바쳐질지도 몰랐던 웁살라 축제에 동참함으로써 점점 바이킹 화 되어간다.
그는 웁살라 축제에서 자신의 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딘이라고 고백하지만, 영적인 사람인 신관은 그가 팔에 차고 있던 십자가 조각을 알아차린다. 라그나의 일행에게 그와 같이 순결하지 못한 영혼은 제물로 드려질 수 없다고 말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애설스탠은 라그나와 가까워지고, 뿔 컵으로 술을 마시고 다른 바이킹들과 대화를 하는 등, 바이킹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는 듯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그는 라그나에게 전투술을 배우고, 호릭왕과 라그나가 동시에 잉글랜드로 항해할 때 동족 앵글로-색슨 족을 살해하기도 한다. 그 원정에서 라그나가 보그 백작의 침략 때문에 카테카트로 떠날 때, 잉글랜드에 남는 바람에, 색슨족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십자가 형 말이다. 색슨 족은 동족을 배신하고 이교도에게 붙은 이 불쌍한 색슨 족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 위에서 죽일 생각으로 십자가에 매달지만, 기적적으로 그는 부활한다!
이 드라마에서 애설스탠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추후에 신세계로 간 우베 아들의 이름이 라그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끝난 후 개종하게 되는 흐빗세르크는 애설스탠이란 세례명을 받는다. 애설스탠 때문에, 두 위대한 왕의 마음이 흔들리고, 한 왕자가 처를 잃고 영혼이 파괴되고, 그의 처는 애설스탠으로 인해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왕인 앨프레드를 낳는다. 극 중에서 영국의 유일한 대왕이자, 통일 잉글랜드의 아버지인 앨프레드는 애설스탠의 씨앗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 비범한 수도승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아무튼, 십자가에 매달린 그는 에그버트 왕의 중재로 살아난다. 왕의 왕궁에서 신임을 받으며, 왕의 마음속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후에 에그버트 왕은 그를 아주 영적이고 신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자신의 며느리인 주디스와 통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애설스탠은 다시 라그나를 만난다. 몇 년 후의 일이다. 애설스탠은 다시 선택의 기로 앞에 선다. 에그버트 왕은 그에게 묻는다. ‘라그나를 따라갈래? 나랑 남을래?’ 그는 라그나를 선택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가 라그나 곁에 남은 이유는 라그나에 대한 정 때문이거나,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던 그의 신앙 때문이다. 그는 에그버트의 왕궁에서도 성모를 보거나, 피를 흘리는 그리스도를 목격하는 둥, 자신이 카테카트에서 오딘과 토르를 보고 느끼던 것과 마찬가지로 환각에 시달린다. 그는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두 영적인 존재를 보았다고 믿는다. 적어도, 카테카트로 다시 돌아오는 시점에서 애설스탠은 여전히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즈음, 라그나는 애설스탠 없이는 못 사는 병에 걸린다. 다른 바이킹 동료들과 말을 하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고, 심지어 부인과도 말하지 않고, 애설스탠과 단독으로 ‘신’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호릭 왕의 습격 사건으로, 라그나는 동료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즈음부터 그는 대회당 맨 구석의 그물 뒤에 서서, 동료들의 행동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믿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처럼. 결국 그의 결론은, 믿을 사람은 순수하고 충성스러운 영혼인 애설스탠 밖에 없다는 것.
어느 날, 애설스탠은 자기 집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을 확신한다. 그는 곧장 라그나에게 달려가서, 이제 카테카트를 떠나도 되겠다고 말한다. 그 말에 라그나는 역정을 내며,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나를 두고 가긴 어딜 가?’라고 소리치며 그를 껴안는다. 애설스탠은 라그나의 마음을 그제야 알아차리는지도 모른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뒤, 플로키는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애설스탠을 살해한다. 라그나가 그 하고만 대화를 하고 자신들은 소홀히 한다는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신들의 뜻을 빙자해 벌인 살인이다. 애설스탠의 시신을 묻으며 라그나는 슬픔에 허우적거린다. 라그나는 천국의 문이 닫히는 환상을 보기도 하고, 파리에서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결국 애설스탠의 믿음의 형제들인 프랑키아 사람들을 무참히 도륙한다.
라그나는 애설스탠 사후, 애설스탠의 빈자리를 채워보려고 중국인 노예 이두를 곁에 두는 둥, 외로움으로 몸부림친다. 아우슬라그가 하바드와의 간통 사건으로 신임을 잃은 사건이며, 장애인으로 태어난 아들 아이바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지 못하는 것이며, 롤로와 플로키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며.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인간들과의 정을 거의 끊어버리다시피 한다. 그는, 이두가 마약을 빌미로 자신의 비밀(웨섹스 정착지 주민들이 도륙된 사실을 고한 농부를 살해한 일)을 사람들에게 일러바치려 하자 이두까지 살해한다.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사람들을 죽이며 그의 인간성은 바닥까지 떨어진다. 파리에서 롤로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그는 유유히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바이킹 세계를 떠난다. 적어도 10년이 지난 뒤에야, 라그나는 카테카트로 다시 돌아온다. 아무도 라그나를 반기지 않는다. 심지어 아들들조차도. 같이 웨섹스에 원수를 갚으로 가자는 라그나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그나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마무리 지으리라는 신념을 품고 있다. 이 신념은 단계적으로 진화의 과정을 거쳐온 것이다. 그는 극 초반에 자신이 오딘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신자였다. 그러다가 애설스탠과 가까워지며 기독교 신에게 흥미를 보였고,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로 마음을 돌리는가 하지만, 다시금 기독교인들을 살육하며 기독교 신에게서도 떠난 모습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신앙해 오던 오딘 신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예언자가 라게타의 운명을 점지해서 라게타가 스스로를 유산으로 이끌고 난 직후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바이킹 신들마저 떠났고, 이제 그의 곁에는 신들도, 사람도 없다. 바이킹의 신들도, 신들의 대리자인 예언자도, 그의 운명을 점지해주지 못한다. 기독교의 신도 그를 다스릴 수 없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괴로운 삶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죽음으로써.
그는 자신을 따르겠다는 아들 아이바와 몇몇 늙은 바이킹들과 함께 잉글랜드행 배에 오른다. 아이바와 함께 바이킹들을 다 죽이고, 웨섹스 왕궁으로 찾아간다. 거기서 철장에 갇힌 채, 에그버트 왕과 최후의 담화를 나눈다. 대화 주제는 두 왕이 사랑한 애설스탠과, 신들이다. 라그나의 결론은,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라는 것이다. (에그버트는 아직 기독교의 신을 믿고는 있으나, 자신의 추악한 죄악들 때문에 자신이 기독교 신에게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그나의 마지막 계략에 의해, 에그버트는 라그나를 노섬브리아의 에일라 왕에게 보낸다. 떠나기 전, 라그나는 에그버트에게 애설스탠이 끝내는 기독교의 신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앨프레드에게는 애설스탠의 징표인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로 준다. 노섬브리아에 다다른 라그나, 에일라 왕은 그를 능욕한 뒤에, 뱀굴에 빠트려 죽인다. 죽기 전, 라그나는 믿지도 않는 바이킹 신들과 발할라를 찬양한다. 앵글로-색슨족에게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는 추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띤 대사일까. 라그나는 이 말을 끝으로 죽는다. ‘늙은 수퇘지가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들으면 새끼 돼지들이 얼마나 꿀꿀거릴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