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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타카 Dec 27. 2020

부족, 왕

인류의 기원이라는 영장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화석으로 발견되었다. 첨단과학을 동원한 DNA 연구 결과 아프리카를 인류의 발원지로 지목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먼 조상님은 아프리카 벌판에서 활보하셨을 것이다.      


아프리카는 크고 작은 3,000개가 넘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다. 아프리카엔 54개국이 있다고 하니, 한 나라당 평균 60개 정도의 부족이 있는 셈이다. ‘부족이 많다고 해도 별 차이 있겠어?’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피부색은 비슷할지 몰라도, 골격이나 키 얼굴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고 기질에서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일본인들과 차이가 있듯 말이다.  

    

필자는 아프리카 부족을 영화 ‘부시맨’과 ‘타잔’을 통해 이해했었다. 콜라병을 들고 맨발로 뛰어가는 부시맨, 타잔에서 등장한 부족들은 석기시대를 겨우 모면한 듯한 듯 보였다. 그래서 아프리카에는 원시적 공동체 형태의 부족들만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가죽으로 기워 만든 옷을 입고, 목에는 짐승이빨로 장식한 커다란 목걸이를 걸고, 맨발에 나무 창을 들고 있는 모습. 자연과 벗하며 순박하고 착하게 살다 보니, 유럽의 침략에 속절없이 무너져 노예로 팔려나갔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입관은 아프리카 ‘가나’에 첫발을 내딛고 얼마 안 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니까, ‘가나’에서 가장 큰 부족인 아산티는 예전에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했다는 말이죠. 침략자인 영국과 싸워 물리친적도 있고, 영국의 지배하에서 독립투쟁을 했고요, 현시대의 아산티 왕은 평화를 사랑하기에 ‘가나’가 분쟁이나 내전 없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거란 말씀이네요?    


가죽옷에 나무 창을 들고 벌판을 뛰어다니며 사냥으로 연명했을 사람들이 과거에 제국을 건설하고, 독립투쟁을 했다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말만 듣고 믿기는 어려워 아산티의 역사를 찾아보았다. 아산티는 현재 가나 땅 대부분과 코트디부아르, 토고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아산티 제국의 중심 부족이었다. 1701년부터 1901년까지 이어온 서아프리카의 독립국이었으며, 19세기 이후 4번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에 패하여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아산티 왕을 중심으로 한 끈질긴 투쟁으로 1935년 아산티 부족을 자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아산티 제국은 왕과 귀족, 군대, 노예제도가 있는 신분제 사회였으며, 켄테(Kente)라는 문양의 전통 옷이 알려질 정도로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국가였다. 그러니까 필자의 뇌리 속에 박혀 있던 가죽옷을 입고 나무창을 들고 벌판을 뛰어다니던 원시부족과는 거리가 멀다.      


서아프리카국가 중 하나인 ‘코트디부아르’에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서아프리카에는 그리스 문화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사람들 생활 속에 깃들어 있는 거죠. 유럽보다 더 남아 있다는 말도 있고요.”     

“그리스요?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가 있던 바로 그 그리스 말이지요?”

“예, 오래전 사하라 사막에 초원지대가 많았을 때, 교역상들이 말을 타고 서아프리카와 그리스를 오가며 무역을 했답니다.”     


대략 만년 전에는 사하라 사막은 푸르렀다고 한다. 지구의 축이 바뀌어 기상이 변하는 등등의 이유로 사막화가 시작되었는데, 대략 5,000여 년 전까지도 초원지대가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테네가 3,4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도시국가인 바, 과연 말을 타고 사하라를 건넜을지는 의문이었다.      


코트디부아르 전통 옷에 사용되는 천의 문양과 색, 조각 같은 공예품들은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식민지 시절 유럽에서부터 유입된 문화의 영향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진짜 그리스에서부터 문화가 전수되었는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아프리카 고유의 문명에서부터 기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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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가 아프리카의 나일강이다.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이집트가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문명국이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러브스토리에 등장하는 시바의 여왕, 그들 사이에선 난 아들 메넬릭 1세는 기원전 800년경 에티오피아를 건설했다.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던 카르타고는 스페인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로마를 긴장하게 했던 국가였다.      


이들 사하라 북쪽에 위치했던 국가들은 돌로 건축물을 지었으며, 문자가 있거나 유럽역사에 기록으로 남아있어 고대 국가의 면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건축물은 주로 나무를 이용했으며, 글 대신 말로 역사를 전했다. 고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귀족 중 역사를 말로 전하는 역사가 가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한다.      


역사드라마를 보면, 임금 옆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앉아서 주요 대소사를 기록하는 장면을 나올 때가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는 왕 옆에 상시 대기하면서 국가의 주요 대소사를 모조리 암기하는 역사가가 있었다. 

이들 역사가는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한 부족, 한 국가의 역사를 통째로 외우고 있는 역사가 가문의 몰락은 국가의 존재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나무로 지은 건축물 역시 세월의 풍파에 사라져 갔을 것이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하라 이남 지역의 역사 상당 부분은, 북아프리카를 지배했던 국가의 기록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지배자는 아랍인들이었는데, 교역이나 침략을 통해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과 접촉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중세 이후 아프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의 기록도 있다. 이들을 통해 전해진 아프리카의 역사는 외부인들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20세기 후반에서야 구전으로 전승되는 내용, 발굴된 유적을 토대로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 역사이 재조명 되었다. 그런 아프리카의 역사 속의 부족들은 '부시맨'이나 '타잔'에 나오는 부족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고대로부터 국가를 형성했다. 그리고 의외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관련된 부분이다. 고대 아프리카 제국의 통치자들은 전쟁포로나 범죄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다른 나라에 팔았다고 한다. 수익이 다른 교역물보다 좋아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유럽과의 해상무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할 때쯤, 유럽에서의 노동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목화, 사탕수수와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예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노예무역은 나날이 번성해지고, 서아프리카 집권층의 중요한 돈줄이 되었다. 하지만 수요가 늘자 공급이 이를 못 따라가게 되었다. 더 이상 전쟁포로나 범죄자만으로는 해외에 내다 팔 노예수요를 맞출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집권층은 죄 없는 약한 소수 민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잡아다가 이를 노예로 팔았다. 한 나라의 왕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국의 국민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긴 것이었다. 노예무역에 대해선 유럽 노예상과 아프리카 집권층은 동업관계였다.          


19세기 유럽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을 때도,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반대했다. 다른 부족에서 잡아들인 노예,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기 싫었던 탓이었다. 이런 역사적 서술을 보기 전 까진, 잔혹한 유럽인들에 의하여 흑인 노예가 전 세계에 퍼진 줄 알았고 아프리카인은 피해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랐던 게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아니었을까?     


아프리카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부족 간의 경쟁, 시기, 반목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나 아프리카의 국경은 유럽 열강이 마음대로 자로 그어서 만들었기에, 원래는 따로 살던 부족이 같은 울타리에 살게 되었다. 부족 간의 갈등이 더 심화될 여지가 생긴 것이었다.      


나이지리아, 넓은 땅 덩어리만큼 대략 200개의 크고 작은 부족이 모여 사는 나라다. 부족 간에 사이가 좋은 경우도 있지만, 사이가 극도로 나쁜 경우도 있다. 2018년 6월, 부족 간 갈등이 심화되어 86명이 사망했다. 목축을 하는 부족과 농경을 하는 부족의 해묵은 갈등이 원인이었다.     


그 이웃나라 코트디부아르에는 바울레, 아케이, 보노 등 다양한 부족들이 협력과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도 종교가 연계된 문제로 내전이 발생하여 코트디부아르는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일을 하면서 들은 바. 코트디부아르 내전 뒤에는 부족 간의 이해득실이 있었다고 한다. 종교보다는 부족 간의 다툼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르키나파소 인구 절반 이상은 모씨족이다. 프랑스와 영국이 자기들 입맛에 따라 국경선을 그으면서 모씨족의 상당수가 가나에 강제로 편입하게 되었다. 가족, 친지들이 국경선으로 인해 분단된 것이었다. 가나는 아산티족이 득세하는 나라. 만약 아산티족이 모씨족에 악감정이 있었다면 혹은 아산티족이 호전적인 부족이었다면. 가나는 바람 잘 날 없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족 간의 갈등은 현장에서 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자칫 잘못하면 국가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고만고만한 부족이 많은 나라. 주요 부족이 와해된 나라에서는 부족 왕이나 귀족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가나의 아산티 같은 대 부족이 있는 나라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정치인들이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영향력이 큰 부족 왕이나 귀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자체만 봐도 얼추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시장군수는 당선을 위해 입김이 강한 지역유지나 특정 성씨의 어른에게 잘 보여야 한다. 군수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직원은 지역 내 친인척인 많은 직원이라는 말도 있다. 아프리카는 이보다 훨씬 심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만약 부족의 왕이나 귀족이 특정 정치인을 미워한다면, 그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은 뚝 떨어진다. 부족의 리더는 정치인의 목숨줄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겐 책임 없는 권력이 부여되었다.     


이는 해외원조나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파올로 씨 프로젝트를 못하게 될 뻔했다면서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 지역 부족 실세와 사전 조율이 안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 건 해당국에서 미리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다행히 잘 해결되었어요. 탐욕스러운 부족이 아니더라고요.”    

 

나는 다행스럽게도 부족으로 인해 문제 되는 부분은 피해 갈 수 있었다. 현지에 정통한 동료들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주었고 운이 따랐다.     


부족에 대한 정보는 일뿐 아니라 여행에도 필요하다.      

"피터! 세렝게티로 여행을 하려 하는데 A국으로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B국으로 가는 게 좋을까?"

"내 생각에는 B국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어 A국 세렝게티 지역 부족들이 좀 얍샵하고 돈을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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