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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오늘 하루도 무탈함에 감사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by Kimkim

지난주 부고를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한 살 아래 동생의 죽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고 황망했지만 그 아이가 발을 디뎠던 땅과 나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였을까, 나는 바삐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다시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에 의한 타살이었다.


스무 살 때는 몰랐던 이야기들을, 아니 뉴스로만 알았던 이야기들을 삼십 대가 되면서 종종 듣게 된다. 여성을 향한 폭력이 소설이나 뉴스 보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내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조금 더 커서야 알게 되었다. 멀쩡히 함께 식사도 하고 웃고 이야기 나눴던 그놈이 집에서는 내 친구를 구타하던 놈이라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그 이질감, 그리고 친구의 출산과 함께 증발해 버린 친구 남편에 대한 분노 같은 감정들은 가끔 잊어버릴만하면 다시 살아난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네 여자들의 역사가 읽힌다. 여성은 때로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때로는 방관자, 혹은 "피의자"로서 나타난다. 다만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도 우연하고 개인적인 일이 아닌 사회의 젠더 규범아래서 발생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번주에 신작으로 착각하고 실수로(?) 읽어버린 공지영의 착한 여자 (1997)에서도, 다른 여러 공지영의 소설에서도 여성은 종종 젠더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그 삶이 희생되곤 한다. 그들의 희생은 당연시되기도 하며, 개인적인 일 취급되기도 한다. 종종 여성의 결함 때문이라고 결론 내어지기도 한다. 여성이 남성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종손을 낳아야 하며, 또 남성의 아내이자 어머니는 순결해야 한다는 그 생각은 박완서와 공지영의 책에서 반복되어 제기되는 문제이다.


부모의 아들에 대한 사랑, 집착, 소유욕을 어떻게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가지는 소유욕과 우월감 (혹은 열등감)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친구의 일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 우리는 십 년이 조금 넘는 이 시간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착하기만 하던 그 친구의 웃는 얼굴과 얇은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결혼식을 올리며 함박웃음을 짓던 그때에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그들을 파국으로 이끈 그 환상적 가족 이데올로기와 젠더이데올로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소름이 돋는 것이다. 오늘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여성인 내가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 가족에게서, 길에서, 어딘가에서 희생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하루인 걸까.


괜히 오버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이건 어쩌다 일어난 '사고'일뿐이라는 말이.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듯 보고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깊게 고심하지 않는다면 진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매일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이런 공포 (죽음의 위기뿐만이 아닌)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일 수 없다.

한 명의 소중한 생명이 꺼짐에 망연함과 분노가 일렁인다. 축적된 분노는 무엇으로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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