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였는데, 해외에 나간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패키지여행이었는데 지금도 드문드문 나는 그때의 기억은 좁은 호텔방, 질긴 닭고기 가슴살, 한국 음식, 졸음이 쏟아지던 에펠탑.. 그 정도이다. 그래도 그때는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설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왜 여행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되어서 교환학생을 가고, 유럽을 여행할 때만 해도 그런 의문은 아직 마음속에서 작은 돌멩이 정도 크기일 뿐이었다. 생각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커졌다. 가족여행으로 준비했던 터키 여행이 취소되고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코타키나발루는 관광객들에게는 최적의 휴양지이다. 훌륭한 리조트, 바다, 산호, 레저 스포츠 등 휴양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나도 좋은 리조트에 머물면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다. 관광객들 대부분이 생각을 내려놓고 안락한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리조트에 말레이시아 손님들은 보이지 않고 일본, 중국, 한국인만 가득한 모습도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리조트 내의 모든 것들이 한국의 물가와 별로 다른 게 없어도 여긴 원래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드디어 리조트에서 나와 코타키나발루 시내로 나왔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상했다. 관광객들이 그렇게도 많은 도시이지만 수입을 거둬들이는 주머니는 따로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지의 삶은 풍족하지 못해 보였다. 내가 여기에서 쓰는 돈은 적지 않은데, 모두 어디로 빠져나가는 걸까.
리조트에서 만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깔끔한 유니폼을 차려입은 청소부와 직원들 뿐이었다. 거기에서는 현지인을 만날 기회도, 그들과 한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볼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시내에 나가니 현지인들의 삶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물건을 팔고, 수다를 떨고, 손님을 불러 모으고, 또 구걸을 했다. 나는 코타키나 여행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삶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잊었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관광객들도 그곳의 문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온 그 해가 지나가기 전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도착한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관광객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바르셀로나를 조금만 벗어나도 관광객들은 보이지 않고 현지인들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스페인을 만났다.
스페인에 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로 짧은 여행을 했다. 아마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 듯했다. 내가 거의 유일한 아시아인일 뿐 아니라 아주 드문 여행객 중 하나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6월 말에는 스페인 소도시에서 많은 축제를 볼 수 있다. 인간 성 쌓기부터 시작해서 빠에야를 나눠먹고, 행진을 구경할 수 있다. 내가 갔던 축제는 마을 사람들끼리의 축제였기 때문에 아담했고 사람 사는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스페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사람들은 음악을 연주했고, 미소를 나눴고 춤을 췄다.
축제에서 돌아오는 길에 탄 기차가 기억에 남는다.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사람들은 시끌벅적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다리가 아픈 강아지를 안고 계셨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건너편에 탄 여자아이는 나를 흘낏흘낏 쳐다보더니 내게로 와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니 기뻐하면서 자신의 친엄마도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막 기차에 탄 청년들은 이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스페인의 너무나도 단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이었지만 내게는 그 장면이 언젠가 스페인에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순간이었다.
바르셀로나라고 하면 흔히 가우디의 건축물을 떠올린다. 그런데 나에게는 전혀 기대하지 않던 시간이 최고의 순간이 되었다. 편안하거나 안락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조금 고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그곳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는 여행에서 희열을 느꼈다. 아마 패키지여행으로 왔거나 유명한 여행지만 찍고 지나갔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경험이었다.
얼마 전 <희망을 여행하라>(임영신, 이혜영 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공정여행에 관한 책이었는데, 이 책은 나에게 앞으로 여행의 지도서가 되었다. 네팔 여행의 꽃인 히말라야 트레킹을 도와주는 포터들이 인권규정에 따라 일하지 못하는 수가 허다하고 그중 얼마나 많은 수가 부상당하거나 죽어가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었나. 물이 부족한 국가에서 4,5성급 호텔을 유지하기 위해 현지인의 터전을 파괴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었을까. 여행지에서 더 이상 현지 사람들이 소외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자인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너무나 안일하고 무책임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책임 있는 여행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행지의 문화와 사람을 배우는 것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여행일 수 있다. 지속가능성이 책임 있는 여행의 의미일 수도 있다. 나에게 여행의 의미가 정립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더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실수도 많을 거다. 그러나 적어도 고민하며 여행을 알아가고자 할 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영국의 유명한 공정여행 단체(투어리즘 컨선)를 포함한 사회적 단체들이 많이 생겨난다. 사람들이 여행에 있어서도 변화를 꿈꾸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