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달러, 잡스가 쓴 심리 트릭

by 진영규

2010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처음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이 물건이 얼마나 싸거나 비쌀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노트북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아닌 '중간 어딘가'라는 낯선 품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잡스는 먼저 화면에 커다랗게 999달러를 띄우고 "이 정도 제품이면 999달러가 적정하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다음 슬라이드에 499달러로 시작하는 가격표를 내놨죠. 순간 천 달러가 머릿속에 박힌 관객들은 499달러를 싸다고 느꼈습니다.

다니얼 카네만의 연구에 따르면, 박물관 방문객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삼나무가 366미터보다 클까요?"라고 물으면 평균 257미터로 추정하고, "55미터보다 클까요?"라고 물으면 86미터로 답했습니다. 똑같은 나무인데 처음 들은 숫자에 따라 키가 거의 3배나 달라진 거죠. 또 다른 대표적인 실험이 룰렛 실험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룰렛 숫자를 보여준 뒤 "아프리카 국가 중 UN 회원국의 비율이 몇 %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룰렛에서 10이 나온 그룹은 평균 25%로 추정했고, 65가 나온 그룹은 평균 45%로 추정했습니다. 룰렛 숫자는 질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도, 사람들의 생각은 처음 본 숫자에 끌려갔습니다.

이를 '기준점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부릅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값을 추정할 때, 먼저 제시된 초기값에서 출발하여 그 값을 조정하며 답을 떠올립니다. 문제는 이 조정 과정이 최초에 제시된 출발값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석사과정 때 했던 공공디자인 관련 아이디어 평가실험도 같은 결과였습니다. 893명의 응답자가 동일한 아이디어를 평가할 때 1점이 미리 체크된 그룹과 9점이 체크된 그룹의 점수가 확연히 달랐거든요. 아이디어의 퀄리티가 아니라, 보이는 숫자가 평가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생활에도 써볼까요. 연봉협상 자리에서는 "손흥민 선수 연봉이 180억이던데요"라고 가볍게 던져보세요. 일주일 휴가를 쓰고 싶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 달 넘게 걸린대요"라고 말을 열어도 좋습니다. 회식 예산이 필요하다면 아무 관련 없는 숫자라도 영향을 받으니까 "지구에서 태양까지 1억5천만 킬로미터라네요"라고 질러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물론 부작용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반은 농담이지만, 실제로 숫자는 우리 눈이 아니라, 판단을 먼저 움직입니다. 기억하세요. 첫 번째 숫자를 던지는 사람이 게임의 룰을 정한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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