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를 만드는 사람과 메뉴판을 만드는 사람

by 진영규

김밥천국 메뉴판을 새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이미 정해진 수십 가지 메뉴를 받아서, 폰트 크기 조정하고, 간격 맞추고, 색상 조합 개선하고, 가독성 높여서 깔끔하게 리디자인합니다. 결과물은 분명 이전보다 낫습니다. 하지만 손님은 여전히 메뉴판 앞에서 뭘 먹을지 고민합니다.

그런데 어떤 디자이너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손님들이 진짜 어려워하는 게 뭔지 관찰하고, 주문 데이터를 보면서 문제를 정의합니다. 메뉴가 너무 많아서 선택이 어려운 거라면 메뉴 카테고리를 재구성합니다. 잘 안 팔리는 메뉴가 공간만 차지하고 있다면 인기 메뉴 중심으로 재정렬합니다. 혼자 온 손님과 둘이 온 손님의 니즈가 다르다면 라면+김밥 같은 세트 메뉴를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성회관 메뉴판은 이기기 어렵습니다. 메뉴가 한우곰탕, 냉콩국수. 두 개로 끝입니다.

토스뱅크나 카카오뱅크의 자유입출금 통장은 한 종류입니다. 기존 시중은행들은 십수 개고요. 다양한 고객층과 니즈를 커버하기 위한 선택이겠죠.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차이입니다.

다만 결과물을 보는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그래서 토스는 쉽던데 왜 다른 은행앱은 더 쉽게 안 되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십수 개의 상품을 화면에 담아야 했던 사람이, 한 개의 상품을 파는 앱과 비교당합니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더 어려운 건 사실인걸요.

김밥천국 메뉴판을 아무리 정리해도 애성회관 메뉴판의 단순함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건 역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디자이너가 어느 시점에 참여하느냐입니다. 이미 수십 개 메뉴가 확정된 후라면, 우리는 그걸 예쁘게 정리하는 요청 처리자가 됩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왜 그렇게 많은 메뉴가 필요한가를 함께 논의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고객 관점으로 문제를 재정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객중심 디자인의 가치는 화면을 그리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왜 만드는 가를 함께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문제 정의자가 아니라 요청 처리자로 인식된다면, 우리는 계속 메뉴판만 정리하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애성회관 곰탕은 정말 맛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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