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3주간의 여행을 위해 여러권의 지도책을 뒤적이며 두 배의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6,200km, 한반도를 남북으로 30번 종단하는 거리를 달리면서 경험한 것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도심에서 출발하며 처음 마주한 건 수많은 교통 표지판들이었습니다. 고속도로 진입로마다 빼곡한 방향 안내판, 제한속도 표지, 스탑 사인, 좌회전 금지 표시들. 모두가 중요한 정보인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더 헷갈렸습니다. 현재 우리가 만드는 대부분의 UX가 이런 모습이죠.
그래서 UX 디자이너들은 오랫동안 심플함을 추구해왔습니다. 애리조나 주의 벌판을 달릴 때 만난 "다음 주유소 50마일" 표지판 처럼요. 정말 필요한 정보만, 군더더기 없이.
그런데 현실은 복잡합니다. 사용자 니즈는 다양하고, 제공해야 할 기능은 계속 늘어나니까요. 아무리 심플하게 만들려 해도 결국은 메뉴 깊숙이 숨기거나,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진짜 심플함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이미 완벽한 해답이 있었습니다. 바로 네비게이션입니다. 네비게이션은 전혀 심플하지 않습니다. 실시간 교통정보, 경로 옵션, 주변 시설까지 엄청나게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하거든요. 그런데도 사용자에게는 "800미터 후 우회전"이라는 간단한 안내만 보여줍니다.
핵심은 개인화입니다. 도로표지판은 모든 차를 위한 모든 경로를 안내합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은 오직 나의 목적지, 나의 경로, 나의 상황에 맞는 정보만 적시에 제공하죠. 복잡함은 뒤에 숨어있고, 사용자에게는 단순함만 남습니다.
AI 시대의 UX는 바로 이런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앱에서 수십개의 선택지를 나열하는 대신, 월급날엔 '이체' 버튼이, 해외여행 예약 후에는 '환전' 버튼이 먼저 나오는 식으로요.
20년 전 지도책 3권으로 준비했던 그 여행을,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율주행차가 모든 걸 알아서 해줄 시대도 올 거고요. 목적지만 말하면 최적의 경로를 찾아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처럼, 미래의 AI 에이전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은 사용자가 버튼을 눌러야 하지만, 미래에는 의도만 말하면 AI가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요.
그때가 오면 UX 디자이너는 화면을 만드는 일보다, 사용자와 AI가 어떻게 소통할지를 설계하는 일이 더 중요해 지겠죠. 길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사용자가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것. 그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 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