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세계를 서성이다

3월의 어느 날

by 콩나물시루 선생님

약속을 위해 오래간만에 동네를 떠났습니다. 익숙한 동네를 떠나 다른 도시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떠난 텅 빈 교실에서 뒷정리를 하고, 다음 주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퇴근 시간이 훌쩍 다가옵니다. 일주일 동안 쌓인 긴장감이 금요일 오후가 되면 조금은 풀립니다. 집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지만, 시계를 보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저는 항상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는 편입니다. 서두르는 게 싫어서일까요. 도착지를 미리 둘러보고, 여유롭게 앉아 주위를 살피는 것을 좋아합니다. 때로는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오늘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근처에 서점이 있었습니다. 상대에게 천천히 와도 된다는 문자를 한 통 남깁니다. 서점은 저에게 놀이터 같은 곳입니다.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서점 구석구석을 돌아다닙니다.


저는 정지된 세계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많은 세계의 문을 두드립니다.

빼곡하게 꽂힌 책들은 멈춰 있는 세계 같지만, 손을 대는 순간 저마다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좋아합니다.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저를 가득 채워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은 에세이 코너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습니다.

빈틈없이 꽂혀 있는 책등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제, 출판사에서 기다리던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예상했던 답장이었지만 그 메일이 제 마음을 생각보다 많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제 글도 정지된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숨결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저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세상 사이를 한참 서성였습니다.

그리고 서점 안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한 잔 주문했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은 달콤한 맛으로 몸을 달래고 싶었습니다.


카페 앞 계단 형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입이 마를 정도로 단 음료를 마시며, 새로 산 책을 옆에 두고 한참을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주변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누군가는 원형 테이블에 앉아 책 속 세상에 빠져 있고,

누군가는 무언가를 찾는 듯 서점을 이리저리 헤매고,

누군가는 메고 온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두고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갑니다.


저는 멍하니,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정지된 세계,

그러나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세상 속에서.


서점과 도서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서글펐습니다.


그때 제 눈에, 다른 이의 가방에 달린 조그마한 짱구 키링이 들어왔습니다.

짱구 특유의 빨간색 티셔츠와 노란 바지를 입은 채, 두 팔을 쭉 뻗고 어디론가 달려 나가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열심히 몸을 움직여보지만, 짱구는 키링 고리에 매달린 채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저는 한참을 그 작은 키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한 채 매달려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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