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가 뜨거운 여름 햇살과 함께 마무리되어 갑니다. 오늘은 2학기 학급임원선거로 교실이 술렁댑니다.
저는 유독 학급임원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편입니다. 본인들이 지원했고, 친구들이 지지해서 얻은 자리라면 마땅히 자리에 맡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책임과 동시에 양보도 강요합니다. 친구들과 같은 열세 살이지만 임원이기 때문에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나서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양보해줘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맡은 반은 유독 2학기에 학급임원 지원자가 없습니다. 매번 무투표 당선자가 발생하지요. 아마 1학기 학급임원의 모습을 보고 지레 겁먹거나, 혹은 귀찮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해도 역시 지원자가 거의 없습니다. 막상 해보니 힘들었던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았다고 생각했던지 1학기 임원들만 다시 지원합니다. 같은 자리를 연임할 수 없다는 학교규정 때문에, 남자 회장과 남자 부회장은 자리만 바뀌어 당선됩니다. 연임할 수 없던 여자부회장만 다른 친구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지난 20년간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생활했기에 저는 다가가기 어려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좀 더 많은 관계를 가져야 하는 임원은 저와 비슷한 성격의 아이들이 지원했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을 읽고 정해진 선을 정확히 지켜주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1학기 회장 아이는 너무 달랐습니다. 다정한 걸 넘어 정이 넘치는 아이였습니다. 거침없이 속마음을 내뱉고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다가왔습니다. 뭘 하든 말갛게 웃으며 해맑게 다가오니 그렇지 않아도 정이 넘쳐나는 교실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그래서 남은 임원들 중 그나마 말수가 적고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남자 부회장 아이에게 한 학기 동안 여러 일을 부탁했습니다. 그게 회장 아이에게는 불만이었나 봅니다.
허리가 아파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없던 7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상시 혼자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던 태블릿 보관함이 무거워 첫째 줄에 앉아있던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손사래 치며 남자 부회장 아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태린이 있잖아요.
당연히 도움을 요청한 아이가 도와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선생님이 뭐라 말하기도 전, 친구의 말을 들은 남자 부회장 아이가 벌떡 일어나 보관함을 정해진 위치까지 밀어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어갑니다. 황당한 마음에 도움을 요청한 아이에게 왜 네가 도와주지 않느냐고 선생님도 볼멘소리로 투덜거려 봅니다.
-선생님, 저 힘없어요. 태린이가 더 힘세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아이는 배시시 웃어 보입니다. 당혹스러움에 할 말을 잃은 선생님은 헛웃음만 흘립니다. 그 모습에 서운했던 회장 아이가 친구를 쳐다보며 안타까움에 울부짖으며 외칩니다.
-그럴 때 '희재가 있잖아요!'라고 이야기해야지!
그 순간 지지 않고 다른 아이들도 서로 도와주겠다며 외쳐댑니다. 회장 아이가 드러낸 서운한 속마음이 교실 여기저기로 퍼져 교실 전체가 들썩입니다. 도와주겠다는 건지 떠들고 싶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만 받아 한구석에 넣어둡니다.
이런 상황에서 2학기 회장 아이와 부회장 아이의 자리가 바뀌니, 희재가 내심 서운했나 봅니다. 선거를 마치고 방학까지 일주일 남았습니다. 학기 초엔 회장 자리를 버거워했는데 막상 마무리하는 시기가 오니 미련이 많이 남아서였을까요? 선거를 마치고 실수로 남자 부회장 아이에게 회장이라고 불렀더니, 마냥 귀엽기만 한 1학기 회장 희재가 뾰로통하게 쳐다보며 저에게 투정 부립니다.
-선생님! 아직 제가 회장이에요!
한 학기 동안 회장이라는 자리가 무색하게 촐랑거리며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본인의 모습은 생각도 못하나 봅니다. 아쉬움이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은 꾹 삼키고 "그래, 미안해. 아직 네가 회장이야."라고 답해줍니다. 그제야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학기 초 촐랑거리는 아이가 답답해, 몇 번이나 따로 불러 회장의 할 일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한없이 해맑은 아이는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변함없이 밝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부회장에게 회장의 역할을 많이 맡겼지요. 그게 희재의 마음에 많이 남아있었나 봅니다.
소원이라면 남은 일주일간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겠습니다. 20년간 제가 항상 그래왔던 서로 선을 넘지 않던 차분한 교실 분위기를 만들어주진 않았지만, 우리 반에 햇살 같은 웃음과 몽글몽글한 다정함을 꽃 피게 해 주었으니 저도 희재의 부탁을 들어줘야겠지요.
일주일 간 아주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전부 아이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희재야, 준비됐어?
회장 아이는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며 함박웃음과 함께 다시 꼬리 치며 다가옵니다. 선생님도 네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단다. 고마워, 희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