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고민할 때 연필은 내려두기

2025년 11월 26일 알림장

by 콩나물시루 선생님
아악!


고요한 교실에 비명이 울려 퍼집니다. 희재다. 사랑스럽지만 부산스러운 희재가 목을 부여잡고 비좁은 책상 한 귀퉁이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습니다.






졸업이 이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졸업을 앞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기억의 사진을 선물하려 합니다.


오래간만에 6학년 담임을 맡으며 30년 전 케케묵은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 들었습니다. 사진 속 열세 살 선생님은 내리쬐는 태양에 눈이 시렸는지 뚱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진 속 옆자리에는 6학년 3반이라는 이름 아래 1994년을 공유한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졸업앨범 속 이름을 보니 흐릿한 친구들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1994년, 열세 살의 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쉬는 시간이면 바닥에 앉아 친구들과 하루 종일 공깃돌을 던져댔습니다.

'손00'이라는 남자아이가 저를 좋아한다는 괴소문이 돌아 당혹스러웠습니다.

담임선생님 앞에서 단소를 불다 소리가 나지 않아 울상을 짓고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진 열세 살 기억의 전부입니다.


과거는 추억으로 남기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의 기억을 글로 남겨주고 싶습니다. 시간이 흘러 내 아이들이 선생님 나이 즈음이 되었을 때, 열세 살의 순수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면 내 삶이 조금이나마 따스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부터 졸업까지 저희 반은 마지막 프로젝트 '개인 문집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6학년의 기억을 글로 잡아두려 합니다. 오늘은 문집 만들기의 첫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우리 반 친구 26명의 장점 찾기'입니다. 나와 1년, 6학년 12반을 함께 공유한 내 친구들의 장점을 찾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갑니다. 특별한 인연을 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며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립니다.


아이들도 글을 쓰다 말고 생각이 많아지는지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의 눈빛에서 함께한 1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이 교실에 울려 퍼집니다.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아이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려봅니다. 희재입니다. 희재가 목을 부여잡고 "아파! 너무 아파요!"라고 외쳐댑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비좁은 책상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비 꼬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있습니다. 평상시 워낙 말이 많은 아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지만 희재의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희재야, 왜 그래?


-선생님, 저 연필에 목이 찔렸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요? 저희 반은 짝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짝이 될 수 있도록 항상 1인 책상 형태로 앉아있습니다. 더군다나 희재는 벽 쪽에 붙어있는 자리라 누가 연필로 찌르려 해도 찌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연필에 찔렸다는 걸까요?



-선생님, 저 연필을 들고 고민하다가 제가 제 목을 찔렀어요. 지우개가 벽에 걸릴 건 뭐야? 아우, 너무 아파요.



희재가 목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합니다. 아, 이해가 갔습니다. 아마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친구를 바라봤겠지요.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가 벽에 걸려 딱 붙어있는 것도 모른 채, 벽으로 점점 몸을 기대니 들고 있던 연필에 스스로 목을 찔렀겠네요.


크게 다치지 않았을까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희재의 목을 살펴보니, 목 한쪽에 작은 점 하나가 찍혀있습니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연필심이 박혀있지 않을까 희재를 보건실로 보냅니다.


아프다고 그렇게 소리치면서 별거 아니라 떼를 쓰는 희재를 억지로 보건실로 보냅니다. 보건실에서 돌아온 희재는 교실 앞문을 열고 당당하게 소리칩니다.



-선생님, 조금만 잘못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데요. 표피가 아니라 진피까지 들어갈 뻔했데요.



목에 밴드를 붙이고 개선장군처럼 들어온 희재는 배시시 웃으며 부상정도를 교실에 크게 알립니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기대했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많이 다치지 않은 희재를 보고 허탈하게 웃습니다.


오늘도 희재를 위한 알림장입니다.



2025년 11월 26일 알림장

서른둘. 필기도구 안전하게 사용하기
1. 뾰족한 연필이나 펜 사용할 때 항상 조심하기
2. 주위 사람 잘 살피고 연필이나 펜, 가위 등 휘두르지 않기
3. 고민할 때 연필은 내려두고 생각하기



덩치만 커진 우리 아기들이 벌이는 짓이니 매번 알려줘야겠지요. 알림장을 쓴 후 필기도구 사용법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연필을 들고 이동하지 말기

가위는 항상 제자리에 앉아서 사용하기

고민이 있을 때 연필을 내려두고 생각하기

가위와 날카로운 물건을 건넬 때는 친구의 눈을 보고 직접 손에 건네주기


너무 당연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매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교실입니다. 오늘처럼 스스로가 자신을 찌를 땐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제가 희재 옆에 붙어 앉아있어도 막지 못했겠지요. 아이 스스로가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이야기해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반 알림장은 매번 6번, 7번을 쉽게 넘어갑니다. 하루에도 해야 할 말이 산더미처럼 생겨나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배워가는 거지요. 마흔이 훌쩍 넘은 저에게 이제 이런 말을 해 줄 선생님과 부모님은 없습니다. 대신 제가 어린 시절 당신들께 들은 말을 우리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며 당시 잔소리라 치부했던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우리 아이들에게도 알림장은 쓰기 싫은 잔소리 한 바닥이겠지만, 매일마다 조금씩 쌓여가는 선생님의 바람이 어느 순간 아이들의 마음에도 녹아들어 차곡차곡 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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