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졸업을 두 주 앞둔 어느 날
학교에서 가장 싫어하는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아직 2025학년도를 마무리하지도 않았지만, 12월의 학교는 2026학년도를 준비합니다. 내년을 위한 업무분장 기간입니다. 학교에서의 최종 결정권자는 교장선생님이지만, 1차적으로 교사들은 희망 학년과 희망 업무를 적어냅니다.
업무희망서를 앞에 두고 생각이 많아집니다. 제가 미쳤나 봅니다.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뜯어말리는 6학년을 다시 한번 더 해보고 싶어 집니다.
저는 올 한 해 우리 반 아이들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했습니다. 아이들 속으로 더 섞이고 싶어 우리 반 각종 행사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앞둔 텅 빈 교실에서 어렴풋이 아이들이 건넨 선물 같은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순간이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2학기에는 매일매일 하루의 일상을 글로 남기고 그중 일부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한 시간이 글로 살아나고, 글 속에서 내가 놓친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아이들도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지원이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저희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도 선생님을 좋아해요
커다란 하트 사이에 또박또박 적어 내려 간 한 문장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이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도 아이들을 좋아했던 건데...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할까요? 주고받는 마음에 그 시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졸업식을 두 주 앞둔 오늘 아이들에게 선물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교직인생 21년 만에 처음으로 선물을 강요해봤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기억을 가지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기억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선생님의 기억을 품고 싶습니다. 그래서 올 한 해 선생님과 가장 행복했던 기억의 순간을 글로 남겨 달라고 부탁합니다.
-선생님 사랑해?
-네.
-얼마만큼 사랑해?
-우주만큼요.
-그럼 우주만큼 써 내려가야 하는 거야. 앞, 뒷장 꽉 채워서.
뼈가 섞인 농담을 던지며 선생님은 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라도 되는 냥 선물을 졸라봅니다. 아이들은 연필을 손에 쥐고 고민에 빠져듭니다. 선생님과의 행복한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고민의 시간에 잠겨듭니다. 희재가 갑자기 손을 들고 진지하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이거 선생님만 보실 거지요? 다른 친구들 안 보여줄 거지요?
아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물론이지. 이건 선생님만 보는 내 선물이야" 희재는 만족스러운 답변에 의미심장한 얼굴로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럼 저 정말 솔직하게 쓸게요.
<프롤로그>
2025년, 봄 벚꽃잎처럼 나에게 나타난 정00 선생님. 함께 했던 기억도 이젠 정리하고 떠나야 하지만 선생님의 기억 속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함께 했던 6-12반이 끝까지 기억되기를...
하나. 2025년 1월의 공기로 돌아가는 중...
어느새 우리의 190일이 9일로 변해버린 지금, 우리의 1년 향해는 여기서 끝날지라도, 서로가 다른 꿈을 꾸듯이, 우리 모두 그 꿈에서 깰 때는 같은 자리에 6학년 모습 그대로 만날 것이다. 우리 모두 그때까지 행복하게, 최선을 다해.
둘. 우리에게 단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2025년, 내가 태어나서 가장 빠르게 지나갔던 1년. 제발 한 번이라도 같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는 날이 꼭 있기를. 그게 중학교 때든, 성인 때든.
셋. 추억의 필름들...
순간이 모여 기억이 되고, 기억이 모여 1일이 되고 이것이 매일 반복되면 내가 되듯이 1년 동안 같이 생활하더라도 개개인의 추억은 다르다. 마치 내가 선생님과 함께 지냈던 190일의 여정이 가장 행복했듯이. 그 어떤 기억보다도. 함께 웃고, 이야기했던 날들이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꼽씹을수록 슬프다.
넷. 편지를 전한다는 것은...
선생님이 나를 아껴주셨듯이 끝 앞에서는 이제 내가 선생님을 사랑해 줄 때가 된 것. 평소에도 많이 사랑하기 했지만, 선생님과 나는 평행하지 않는 직선이면 좋겠다. 선생님과 내가 평행하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다섯. 개인의 기억
선생님과 함께한 기억은 수도 없이 많다. 졸업영상 촬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말 선생님과 학교를 돌아다니는 것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곽00
아이들이 써 내려가 편지에 나도 모르는 내 뒷모습이 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졸업식이 이제 9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헤어질 때 "내일 보자"라는 말을 더는 할 수 없는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