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 2) 복지국가의 목적에 대하여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불평등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자본주의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근대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 충돌을 우회하기 위해 20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사회권이라는 개념은 복지국가의 핵심을 구성한다.
민주주의의(democracy)는 기본적으로 평등의 원리를 따른다. 이것은 ‘인민(dēmos = people)이 인민 자신을 다스리는 체제(kratos = rule)’이다. 이처럼 다스리는 자(sovereign)와 다스림을 받는 자(subject)가 구별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을 구성하는 시민들이 모두 평등한 존재로 인정되어야 한다. 과거 봉건 사회에서는 공동체 내 구성원들의 신분이 나뉘어졌다. 이는 곧 더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예. 왕)이 더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예. 귀족, 기사, 농노 등)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서로 다른 신분을 가진 사람은 서로 다른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반면 근대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모든 시민이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의 체제에서의 시민은 누구인가? 시민(citizen)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으로, 일정한 권리들과 의무들을 가진다. 이때 권리는 의무와 더불어 시민이 시민이 되게끔 하는 조건들, 즉 시민성(citizenship)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누군가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가 타인 또는 국가에게 그 권리의 보장을 당연하게 요구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이것은 그가 자신의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를 다해야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내 인생을 ‘책임감 있게’ 열심히 산 여부와 내게 주어지는 권리의 내용 및 종류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시민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것은 개별적 상황과 상관없이 시민의 자격에 부합하는 권리를 평등하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시민권과 정치권만 평등하게 보장되면 민주주의적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민권(civil rights)은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들로 구성된다. 신체의 자유, 생각⋅양심⋅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사적 재산을 소유할 자유 등을 보장하는 권리들이 이에 해당한다. 정치권(political rights)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들로 구성된다. 참여의 형태가 특정 정치체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 되든, 그 정치체의 구성원을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이 되든 말이다.
매년 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표(Democracy Index)는 오늘날 시민권과 정치권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지표 산출을 위한 설문조사 질문들은 5가지 범주로 나뉜다: 1) 자유로운 선거(free election), 2) 시민의 자유(civil liberties), 3) 정부의 기능 수행(functioning of government), 4) 정치적 참여(political participation), 5) 정치적 문화(political culture). 하지만 이처럼 시민권과 정치권에 국한된 이차원적인 접근은 시민들이 사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한다.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평가 방식은 민주주의가 사회를 마주치면서 당면하게 되는 딜레마를 묵인한다.
현실에서 한 시민은 정치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 동시에 존재한다. 예컨대 나는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시민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고 정치에 평등하게 참여한다. 그런데 나는 사회에서 나이, 성별, 소득, 직업, 교육 수준, 인종, 종교 등 나와 너무나도 다른 특성을 가진 수많은 인간들과 함께 살아간다. 문제는 시민들이 정치라는 추상적 차원에서는 평등하지만, 사회라는 경험적 차원에서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완전히 똑같아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런데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들 사이를 갈라놓는 불평등을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한다”라고 과연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본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킴으로써 이 괴리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괴리는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사실 지금까지 말로만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이동이 제한됨으로 인해 이들이 다른 시민들과 충분히 상호작용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그런데 과연 장애인에게 표현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대학병원 전공의는 최대 88시간씩 근무하는 법을, 다른 시민들은 최대 52시간씩 근무하는 법을 적용받고 있다. 주말에도 밀린 잠을 보충하는 데 급급한 전공의들이 어떻게 다른 시민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역으로 주변 의사 동료들을 보면 많은 이들이 30대 초반에 집도 마련하고, 결혼도 하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아이까지 낳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이러한 삶의 방식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렇게나 다른 삶의 조건을 누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평등한 시민으로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사회권의 역사와 복지국가 원리의 핵심을 잘 정리한 사회학자 T. H. Marshall의 정의에 따르면, 사회권(social rights)은 약간의 경제적 복지와 안전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산 속에서 충분히 함께 누리고,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기준에 따라 문명화된 존재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까지(the whole range from the right to a modicum of economic welfare and security to the right to share to the full in the social heritage and to live the life of a civilised being according to the standards prevailing in the society) 포함한다. 즉, 한 사회에서 ‘문명화된 존재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생활 방식에 부합하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웰빙(well-being) 수준을 충분히 공유할 권리를 뜻한다. 이러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장애인이 지하철을 통해 이동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착하거나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공의에게 다른 시민들과 동일한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환자 안전을 향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환자의 의료 접근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의료 이용이 ‘도덕적으로 해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복지국가의 제도들(공공서비스⋅노동법⋅사회보장)은 서로 다른 인간들에게 평등한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고, 모두를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한편 자유주의적 전통은 사회권을 나머지 두 권리의 목록에 병렬적으로 추가하는 데 그치거나, 사회권을 확대할 수록 시민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치철학자 Delruelle이 예리하게 지적하듯, 사회권은 시민권과 정치권의 보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질적 조건이자,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자본주의는 상품화(commodification)의 논리가 적용되는 영역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보건, 교육, 문화, 교통, 에너지를 비롯하여 심지어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상품화의 논리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삶에 필요한 수많은 활동과 자원이 시장에서 단순히 사고 파는 물건으로 전락한 곳에서, 삶에 대한 권리가 서있을 자리는 없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팔아야만 하는데, 그가 시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는 일정한 수준의 삶을 영위할 자격을 잃기 때문이다. 반면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는 삶에 필요한 조건들을 권리로 제공하고, 한 사람이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공공서비스, 노동법, 사회보험은 모두 탈상품화를 위한 국가의 제도적 장치일 뿐이다. 각각의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개인을 시장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충분히 해방시키지 않으면 의미있는 탈상품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탈상품화는 0 아니면 1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 또는 가족이 시장 참여 여부와는 독립적으로 일정한(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늘 "시장으로부터의 면역”이 어느 정도까지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다. 복지국가는 갈등을 제도화하려고 하지, 갈등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을 인정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문명화된 존재의 삶이 단순히 ‘숨쉬고 살아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 사실이 자명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주변 이들에게 왜 국민건강보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민간보험까지 보유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 (설사 민간보험 가입이 도수치료와 백내장 수술의 이용을 증가시킬지라도) 실제로 민간보험을 가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도수치료를 마음껏 받고 백내장 다초점렌즈를 싸게 사기 위해서 민간보험을 구매했다”라고 먼저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의 사회보험이 보장해주는 범위만으로는 일반적인 시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복지국가의 존속을 이야기하면서 인간 생존에 필요한 영역만 국가가 보장해주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시장 원리의 확대를 원칙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다.
누군가는 사회권을 보장하더라도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기 때문에 시민들 사이의 평등은 어차피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평등을 늘 양적으로만 평가하고 질적으로 사고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착각이다. 게다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단순히 ‘논리’에 의해서만 지배되지 않는다는 점은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꽤나 이해하기 쉽다. T. H. Marshall이 이야기하듯, “인간 사회는 꽤나 오랫동안 역설의 스튜 안에서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바로 다음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시민들 사이의 실질적 평등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들의 신분(status) 내지는 사회적 가치(social value)의 평등이지, 그들의 나이⋅성별⋅소득⋅직업⋅교육 수준⋅인종⋅종교의 평등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은밀하고도 위험한 적이다. 복지국가는 사회권의 보장과 탈상품화를 통해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힘에 맞선다. 그렇기에 사회적 차원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단순히 복지 서비스의 제공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복지국가의 개입은 시민들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일부 학자들은 복지국가(welfare state) 대신 사회국가(social state)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복지국가 개혁의 문제는 결국 “어떤 경제, 어떤 정치,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삼중 질문에 걸쳐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건강보험 개혁 관련 논의들을 살펴보면, 경제(더 정확히는 경제도 아닌 금융)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 대한 고려가 거의 실종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복지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복지국가 모델을 다른 식으로 구상할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는 ‘보편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비하기 위해’ 복지국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보편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비하기 위해 왜 국가가 필요한가? 위험 대비의 논리만으로는 국가라는 절대적 힘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국가의 개입 없이 시장 원리를 따르는 민간보험을 통해서도 보편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비하는 것은 가능하다. 애초에 위험이라는 개념은 그 정의상 특정 인구집단 수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할 뿐, 개인적 수준에서 특수하게 존재할 수 없다. 즉, 보험의 개념만으로도 둘 이상의 개인이 보편적 위험에 단체로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둘째, 우리가 소위 ‘복지국가’라고 부르는 것의 제도들을 모두 보편적 위험 대비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는가? 복지국가 제도에는 사회보장 외에도 교육과 같은 공공서비스와 노동시간 규제와 같은 노동법이 있다. 사회보험은 국가가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복지국가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때 ‘위험에 대한 보험’의 개념에만 기대면, 사회보험 외에 복지국가의 다른 기둥들이 왜 존재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단적인 예로 출산 휴가의 존재 이유를 보험의 원리만으로 설명하기는 꽤나 어렵다. 남성은 생물학적 이유로, 일부 여성은 개인적⋅사회적 이유로 출산을 안하는데,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같은 출산의 위험에 처해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보편적 위험 대비의 원리를 바탕으로 복지국가가 이해되는 나라에서 출산 휴가가 제도적으로 정립되기 어려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다른 형태의 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가진 제도들, 그리고 앞으로 가꾸어 나갈 제도들의 정당성을 환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화의 논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적합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일종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권과 탈상품화에 기초해서 복지국가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하면, 복지국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원리(또는 불필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더 분명해진다.
[참고 문헌]
Bellamy, R. (2008). Citizenship: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NY: Oxford University Press.
Delruelle, E. (2019). Philosophie de l'État Social: Civilité et Dissensus au XXIe Siècle. Paris: Éditions Kimé.
Esping-Andersen, G. (1990). 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 Princeton, NJ: Polity Press.
Marshall, T. H. (1950).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In T.H. Marshall & T. Bottomore (Eds.),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pp. 3-54). London: Pluto Press.
박이대승. (2017). 개념없는 사회를 위한 강의. 서울: 오월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