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하지 않겠다는 의지
보라색 꽃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환상의 문이 열리자 몽글몽글, 손을 잡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주렁주렁 끝없이 펼쳐진 보라색 아치 꽃길이 예술이다. 달콤한 향까지 더해 이성은 마비되고 감성은 충만하다.
없애고 싶었다. 아무리 바닥 가까이 바짝 잘라내도 가지가 뻗어 나왔다. 뿌리가 너무 깊어 뽑히지 않았다. 상처 나지 않게 스스로 조심해야 하지만 가지를 피하면 밑둥이, 밑둥을 피하 면 가지가 닿았다.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자리 잡은 그 나무는 피하지도 치우지도 못하는 골 치 덩어리였다. 새똥 떨어지는 자리, 나무가 있는 자리, 그리고 멀쩡한 자리. 이렇게 세 자리 중에 남는 건 항상 상처를 만드는 자리다. 매번 운동하고 늦게 귀가하는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경 험상 차라리 새똥 자리가 낫다. 새들이 어딘가에서 잠을 자고 와서 똥을 싸는지 출근할 때면 물티슈로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새똥을 치우는 게 좋을 리 만무지만 그래도 나무가 있 는 자리는 흉터가 남기 십상이다. 그리고 최대한 주차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고 내려서 보면 이만큼 떨어져 있어 거의 길 중간에 내 차는 떡하니 서 있게 된다. 0 여사가 되어 왔다 갔다 를 수없이 해도 원하는 자리에 세워지지 않았다. 그 자리는 마을 초입이라 자칫 접촉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어 민폐 자리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근처 공터에 차를 대고 걸었다. 그곳도 내 자리가 아니긴 매한가지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공터에 주차를 하고 걸었다. 어, 저게 뭐지? 계속 쳐내느라 항 시 밑둥만 있던 그 나무는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를 드러내겠다고 작정을 한 듯하다. 바로 사 랑에 빠질 듯 나를 마비시켰던 그 환상적인 등나무가 아니던가! 사람 참 간사하다. 갑자기 아 름다운 길이 보이면서 귀가 때마다 열릴 환상의 문이 보이는 것만 같다. 마당 바깥 땅에서 자 라는 나무이니 그냥 놔두기만 하면 클 것이 분명하다. 기대가 컸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보 라색 아치 꽃길이 보인다. 등나무는 기생 나무다. 의지할 것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뭐든 타고 올라갔다. 그 손길을 뻗 는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엔 담장을 넘더니 그다음엔 개집 펜스를 또 그다음엔 펜스넘어 개집 옆 목련나무를 칭칭 감았다. 반대쪽 대문 장미 아치까지 점점 더 뻔뻔하고 점 점 더 당당하게 싸그리 숨통을 조인다. 일단 침범하면 순식간에 세를 확장하여 꼼짝 못 하게 만든다. 끝없이 사방팔방 손길을 뻗쳤다. 생명을 쪽쪽 빨아먹는 악마의 검은 손 같다. 정보를 찾아보니 다른 나무에 의지해 자라면서 그 의지한 나무를 못살게 괴롭힌다고 ‘소인배’라는 별 명이 있단다. 딱 어울리는 기생 나무다.
거침없이 무엇이든 등나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급기야 옆집 담장까지 뻗어나갔고 등나무꽃이 하늘을 덮는 계절에는 개들이 벌에 쏘여 퉁퉁 부었다. 사람도 윙윙 천지에 날아다 니는 벌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를 꿈 꾸게 했던 그 아름다운 길은 등 나무 길은 등나무의 의지가 아님을 알았다. 의지할 곳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혼자 서지도 못 하는 등나무는 다른 생명을 죽여가며 의지한다. 등나무 명소가 그리 예쁠 수 있는 건 누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의지할 지지대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생이 버거운 등나무를 사정없이 다 잘라버렸다. 싹둑싹둑. 칡과 등이 얽힌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갈등’은 애초 남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꼬일 일도 없을 것이다. 애초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자리를 잡았던 등나무는 미련 없이 베어 버렸다. 주차난에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과의 갈등도 등나무를 없애면서 저절로 해결이 되었 다. 자연에서나 인간 세상에서나 초장부터 잡지 않으면 망가지는 관계가 있다. 열심히 살고자 의지를 다지는 노력이 기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튼튼하고 제 자리를 아는 지지대를 만 들어 스스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리라 등나무를 완전히 없애버리면서 나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 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봄이면 아치 대문을 아름답게 장식하던 장미가 등나무에 꽁꽁 묶여 거의 죽어 버렸다. 기생 나무를 없애버렸으니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당당하게 5월의 장미를 피워주기를 바란다. 대신 등나무의 환상은 현실로 나를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