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두기

지우기

by 이윤경

지난밤 비를 흠뻑 맞은 화초는 싱그럽게 되살아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메말라 있었다. 누렇게 들뜬 모습이 보기 싫어 ‘저걸 확 버려?’ 하던 마음은 싹 가시고 간사스럽게 나는 똑같은 화초를 보면서 상큼함마저 느낀다.


화단 경계석에 놓여 있던 화분을 책상에 옮겨 이리저리 돌려본다. 하루 사이 확실히 달라져 생기를 내뿜고 있다. 밤새 단비를 온전히 즐기며 행복에 겨워 춤을 추는 화초가 상상이 되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한 잎 한 잎 자세히 보니 꽤 앙증맞은 모양새다. 꽃을 주로 그리느라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잎의 모양이 예쁘기도 했지만 싱싱함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그리던 그림을 한옆으로 밀고 5호((31.8*31.8) 판넬을 새로 꺼냈다. 이 충만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이를 재단하고 분무기로 흠뻑 물을 뿌리며 어떻게 그릴까 생각한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와 저 귀여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5호 판넬은 팔 안에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크기라 물을 먹어 부드러운 종이를 당기고 네 면에 스테이플러를 찍어 고정시키는 작업이 간단하게 끝났다. 그 사이 연필로 자세하게 스케치를 하고 싶어진 나는 물기가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작은 잎사귀들이 제각기 제 모양을 분명하게 갖추고 있는 모습이 하도 깜찍해 하나하나 그릴 생각에 살짝 흥분이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초를 내다 버릴까 하던 내가 오늘은 설레며 그림을 그리겠다니 변덕이 죽 끓듯 한다.



2H를 꺼내 칼로 연필심을 길게 뺐다. 연필심이 길어야 힘 조절을 하는 묘한 긴장감이 손끝에까지 와닿는다. 나는 이 재미 때문에 스케치를 할 때 샤프를 쓰지 않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유명한 문구처럼 바짝 가까이 앉아 화초를 관찰하면서 눈앞에 잎사귀 몇 개를 자세히 그리니 정말 예쁘다. 나머지는 크기만 대충 잡고 물감을 입힐 때 선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옅게 스케치를 했다. 탁자를 둥글게 그리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귀여운 화초가 둥근 탁자 때문에 두루뭉술하니 둔해 보였다. 다시 지우고 각이 보이게 네모난 탁자를 만드니 그제야 화초가 주인공으로 보인다. 보통은 물감을 번지게 하거나 입혀가며 형태를 만드는데 이번엔 스케치를 먼저 했으니 잎사귀 하나하나 색을 입힌 뒤 지워가는 방법으로 완성을 해나가기로 했다. 물을 충분히 섞은 물감을 먼저 칠하고 깨끗한 붓으로 조금씩 색을 빼내며 양 조절을 하는 방법이다. 그림을 그릴 때 작은 것 하나하나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리다가는 자칫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잘났다고 들고일어나는 아우성 그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주 거리를 두고 그림을 봐야 하는 이유다.



커피를 한 잔 들고 저만치 떨어져 그림을 본다. 잎사귀만 보이던 모양이 그제야 커다란 형태로 눈에 들어온다. 탁자와 조화를 이루는지 뒷배경과 이질감이 들지는 않는지 잎사귀 하나하나가 너무 두드러져 전체를 망가트리진 않는지 거리 두기가 되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뭔가 심심하다. 가지를 더 늘어뜨릴까 잎을 더 채울까 고민하다가 마시던 커피잔을 화분 옆에 그려 넣었다. 화룡점정이다. 딱 마음에 든다. 커피잔이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화초를 받쳐주고 심심한 분위기를 적당히 메꿔주는 느낌이다. 다시 한번 떨어져 거리를 두고 그림을 멀리서 본다. 덩어리 형태를 확실하게 다듬기 위해 가장 앞에 있는 잎사귀를 조금 더 밝게 뺀다.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잡혔다. 멀리 보기의 힘이다.



이제 내 인생에서도 지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보인다. 작은 잎사귀 하나하나에 매달려 내 인생의 크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았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내 삶의 형태를 주변과 조화롭게 만들어 가기 위해 지움을 연습한다.


< 5호 31.8* 31.8 수채화 / 아르쉬지 세목 300g/ 미젤로 미션골드> - 저 많은 잎사귀들을 하나씩 주인공으로 모두 다 만들어주면 그림은 평면이 된다. 원근이 사라지면 앞과 뒤가 모두 같은 선상에 놓여 생동감이 없다. 인생에서도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깨닫기 위해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모두 다 신경을 쓰느라 균형이 흔들렸던 나는 상당 부분 많은 것을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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