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잘날 없어라

by 이윤경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갔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이 마치 운명인 것만 같아 끔찍했지만 엄마가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퇴근한 남편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다.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교양은 남의 것인 양 마구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깨끗하게 해놓고 죽으라고, 나한테 손톱만큼도 피해 오지 않게 정리해놓고 죽으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지 못할 거면 죽어야지 어쩌겠는가. 사는 것처럼 죽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지 뭐. 일은 자기가 다 벌려놓고 혼자만 편하게 죽겠다니 나더러 뒷처리를 하라는 거야 뭐야. 너무 이기적이잖아. 화가 나사 미칠 것 같았고 복잡한 심경이 엎치락뒤치락 널을 뛴다. 숨도 쉬지 않고 몰아붙이는 나에게 남편은 조용히 말했다. 진짜 죽으려고 쓴 유서가 아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기 위함이었다. 사업이 안 되면서 복잡한 일이 생겨 그동안 재판에 불려 다녔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해결하려 했단다.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라며 걱정 말라고 내 앞에서 유서를 찢으며 웃었다.


나의 선택으로만 운명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와 남편은 일이 힘들어졌을 때 가족을 위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 선택은 내 선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삶 전부를 지배하고 흔들었다. 그리고 그 영향의 범주 안에서 버티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져가면서 나는 인생 자체가 우울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는 혈혈단신 자수성가한 기업인이었다. 알아주는 대기업 간부로 오래 일하셨고 독립해서는 그 대기업을 독점으로 납품하던 사업가로 또 오래 일하셨다. IMF가 터지기 직전 정보를 입수했으나 대금으로 받은 어음은 이미 처리할 방법이 없었고 속수무책 부도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IMF가 짓밟은 인생들은 살 길이 막막했고 다시 기회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버지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당신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영영 재기는 불가능했다. 남은 인생에서 반은 술로 반은 병으로 살다 돌아가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과 그 옆을 한결같이 지킨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방에서 매일 술을 마시던 아버지와 마주 앉아 함께 좀 마셔 드릴 걸, 입을 막고 옷장 속에서 울던 엄마를 좀 꽉 안아드릴 걸……


남편은 원래 사업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어찌어찌 사업을 시작했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버지에 이어 남편까지 힘든 상황이 이어지자 나는 혼자 견디고 애써야 했다. 지키는 사람. 떠나지 않는 사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모두 활기차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홀로 고인 물로 썩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 썩은 물 속으로 깊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며 하소연을 하면 그 하소연조차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다. 그들에게 나는 멀리 보이는 인생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 맞다. 그래도 나란 사람이 남들 눈에는 궁색해 보이지 않아 편안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엄마와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깊은 산속으로 기도를 드리러 갔었다. 성당을 다니고 절에를 가고 하다 하다 산속 기도까지 별 걸 다 하는 나다. 믿음이 특별히 있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엄마가 어디선가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함께 가자 했던 것 같다. 어떻게 갔는지 다른 건 다 기억에 없고 산 중간 어디쯤부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휘몰아치고 발은 푹푹 빠지고 너무 추워서 기도는커녕 가다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멈추지 못하고 오로지 걷는 발에만 집중을 하면서 끝도 없이 오르고 또 오르던 산등성이가 이 길이 맞는 걸까 의심스러워질 때쯤 작은 암자 하나가 보였다. 우리 말고도 사람이 꽤 있었고 이렇게 험하고 힘든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신기했다. 엄마를 힐끗 본다. 엄마는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입을 다무셨다. 속으로 기도를 하시는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얼마나 이런 길을 오르내리신 걸까. 울컥했다. 올라올 때 바람이 거세지자 당신 목에서 풀어 내 목에 감아준 목도리를 나는 풀어 다시 엄마 목에 감싸주고 웃어보였다. 엄마의 간절한 모습에 내가 하려던 기도가 의미없게 느껴진 나는 엉뚱한 기도를 하고 말았다. 산에서 내려갈 땐 우리 엄마 춥지 않게 바람을 멈춰달라고.


살다 보면 인생에는 잔잔한 바람도 있고 정신없이 부는 태풍도 있다. 바람 잘날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 바람을 이기려 너무 힘을 주면 자신이 꺾이고 만다. 바람이 왜 부는가는 고민이 될 수 없다. 바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선택이 되어야 한다. 바람을 타고 유연하게 힘을 빼는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새 바람은 지나간다. 오래오래 고생은 했지만 남편 사업은 안정이 되었고 아버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긴 시간이 흘러 엄마도 나도 지금은 잔잔한 봄바람을 맞았다. 그때 우리의 바람은 달랐지만 같은 바람이었고 산 속에서 하던 기도 역시 달랐지만 같은 기도였을 거란 걸 안다. 바람이 반복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고 그 바람을 이겨내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모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한겨울 고산지대에 피는 바람꽃은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연약해 보이는 하얀 꽃이 위태롭다가도 바람을 타는 그 부드러움을 보면 자유로워 보인다. 씽씽 부는 바람에도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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