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아이고, 어무이~~~ 같이 가~~~요~~~~"
엄마가 입원한 병실에 새로 들어오신 할머니는 자그마치 104세다. 침대에 누운 채 아기처럼 어무이를 부르며 요란하게 등장해서는 며칠째 어무이만 찾는다. 간병인의 간략한 소개를 들어보니 104세 할머니는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듯 하다. 이 할머니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치매도 있어 인지가 불분명했음에도 정신이 들기만 하면 어무이를 찾았다. 지각 능력이 없어도 잊힐 수 없는 존재인 당신의 어머니를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서 보고 계신 걸까.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오직 태어남과 죽음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작과 끝이 똑같다는 것인데 이 분명한 답은 현재에 집중해 ‘지금’을 살라는 명언 ‘메멘토 모리’ 를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그 말이 할머니의 탄식을 들으며 다시금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빠르게 노쇠했다. 아버지가 우등생 ( 한 곳의 대학 병원에서 투병을 시작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10년을 학교 등하교 하듯이 다니시다 그 병원 장례식장에서 마무리하셨다. ) 으로 졸업한 병원의 보호자였던 나로서는 아버지에서 엄마로 환자만 바뀐 셈이었다. 똑같은 병원, 똑같은 의사 선생님과 함께 다시 시작된 처음은 나에게 인생의 끝을 감상에서 현실로 마주 보게 만들었다. 유난히 아침부터 어무이를 찾는 104세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 85살까지 살면 딱 적당한데..."
엄마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난 미리 의사한테 말할거야. 콧줄도 심장마사지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아버지는 퇴원을 앞두고 갑자기 의식을 잃어 심폐소생 끝에 하루를 못 넘기고 돌아가셨고 가족 중 가장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형부는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암으로 8개월 만에 죽은 후다.
"엄마, 나도 같이 말하자!"
엄마가 서글플까봐, 엄마가 무서울까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우리 모녀는 둘 다 알고 있다. 계획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훌륭한 능력으로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과연 맞는 선택인걸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급하면 누구나 119를 부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개인적으로 병원을 거부하기도 힘든 상황을 만든다. 집에서 죽을 수 없는 의학의 눈부신 발전은 어쩌면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시대가 만들어 낸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죽나 했더니 눈 떠보면 병원이고 또 병원이더라는 104세 할머니가 잠깐 반짝 정신이 드셔선 말한다.
" 아이고, 몬산다! 내가 몬살겄다! 아이고, 어무이~~~나좀 델고 가요~~~"
할머니의 한탄은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했던 나의 노력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제발 죽게 해달라는 104세 할머니의 절규가 한때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를 질책하는 꾸중으로 들렸다. 노력의 결과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회피였고 지금의 내 여유는 세월이 가져다 준 선물은 아닐까. 질병과 노년, 실패는 삶의 일부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삶의 범위를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명쾌하게 답을 주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사는 데 힘을 뺐더라면 좋았을 걸. 나에 대한 자애가 있었더라면 훨씬 덜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 나이가 되어 봐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작과 끝,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들도 결국은 어떻게 보면 똑같은 것이다. 메멘토 모리는 시작과 끝이 내 손 안에 없으니 그 안에 흐르는 시간, 지금을 활짝 피우라는 뜻이었다. 죽음을 생각하라는 건 죽음을 계획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메멘토 모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스며 든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싶지 않은 104세 할머니도 85세까지 살고 심폐소생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싶은 엄마도 마지막이 조금은 편안하길 바라며 나는 나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대신 ‘지금’ 행복하기로 한다.
활짝 핀 꽃이 인생의 절정 ‘청춘’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생의 절정은 선택할 수 있고 노력할 수 있는 바로 지금, 현재의 삶이다. 살아있는 지금이 가장 예쁘게 핀 꽃이다. 그러니 그 꽃에 깨끗한 물도 주고 따뜻한 햇빛도 쬐주고 아름다운 미소도 지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