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림

내 차례

by 이윤경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촌스러워 보였고 그리는 과정은 갑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기품이 넘쳐 보였다. 그 옛날 그림들이.


시어머니는 여자 손에 가족들 건강이 달렸다고 믿는 분이다. 제 철 음식과 재료 준비로 1년 달력이 넘어간다. 하지만 며느리인 나는 배만 안고프면 문제가 없는지라 시어머니가 힘들었다. 그래도 시어머니 호출이 오면 말은 잘 들었다. 갈 때마다 이삿짐처럼 싸주시는 시어머니 음식을 친정으로 나르면 아버지는 너무 좋아하셨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북에서 먹어 본 맛이라며 콧물까지 닦아가며 만둣국을 드시던 모습이 선하다. 밀가루 반죽을 치고, 주전자 뚜껑으로 손이 아프도록 눌러 피를 만들고 다리에 쥐가 나도 수백 개씩 만두를 빚어 들고 가면 아버지는 행복한 얼굴로 식탁에 앉으셨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요리에도 먹는 것에도 흥미가 없던 내가 시어머니 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졸졸 따라다니며 심부름만 하는 수준이었지만 아버지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나는 열심히 시댁을 들락거렸다.


그런 내게 시어머니는 당신이 죽기 전에 모든 걸 가르치시겠다며 욕심을 내셨다. 어찌할 거나, 나는 불행하게도 콩나물국 하나만 끓여도 잔칫상을 준비한 것처럼 부엌을 어질러 놓는다. 그저 잘 참고 눈치가 빨라 시어머니를 열심히 도왔을 뿐인데 꽤나 살림꾼처럼 생각하시며 기특해하셨다. 배웠어도 못하는 며느리의 실력을 모르는 시어머니는 이만큼 따라다녔으니 언제든 할 마음만 있으면 할 거라고 종종 말씀하신다.


재료를 준비하고 적당한 양과 적절한 양념이 어우러져야 하는 요리 과정이 전통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참 비슷하다. 마음이 있어야 행복하고 보관을 잘못하면 버려야 하는 것도 똑같다.



순지와 비단, 모시 등 우리나라 그림은 그리는 바탕부터 만만치가 않다. 오늘은 모란도를 순지에 그리기로 한다. 한지는 닥나무의 섬유질이 엉켜 있는 거라 미세구멍이 있는데 코팅을 해서 물감이 번지지 않게 사전 작업을 먼저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아교포수다. 아교는 동물의 뼈나 가죽에서 얻어지는 추출액으로 접착제나 코팅제 역할을 한다. 알아교를 먼저 이틀 정도 물에 불리면 개구리알처럼 퉁퉁 불면서 몽글몽글해진다. 냄비에 중탕으로 아교를 완전히 녹이고 물에 녹인 명반을 섞는다. 평붓에 양을 조절해 적신 후 일정한 방향으로 고르게 두세 번 정도 바른다. 잘 말리면 드디어 준비 끝이다. 아교포수할 때는 습기에 약해 비 오는 날은 피한다.

절차가 까다롭고 자칫 잘못되기 쉬워 집중을 하지 않으면 그림은 시작도 못한다. 정성이 깃든 과정 자체가 이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표 우에바 분채 호분을 곱게 갈아 아교와 물을 섞어 물감의 형태를 만든다. 흰색으로 밑색을 칠하기 위함이다. 그다음 채색을 한다. 호분이나 채색 모두 여러 겹의 칠을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밀리거나 뭉치지 않도록 상당히 조심하면서 덧입혀야 한다. 그다음은 바로 가장 중요한 바림을 할 차례다. 서양화의 그러데이션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진한 색에서 차츰 엷게 물감을 끌어가며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색을 펼치는 작업이다. 긴 시간 인생을 켜켜이 쌓는 것처럼 바림도 끈기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이즈가 커서 바닥에 종이를 놓고 거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저절로 자세가 겸손해진다.


오래 그림을 그린 만큼 생각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기대만큼 음식을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성에 이제 감사할 줄은 안다. 간수까지 공수해 두부도 만들고 때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김장과 제사가 두렵지만 그래도 곧잘 재료 손질도 알아서 척척 할 정도가 되었다. 요리솜씨는 타고난 거라 어쩔 수 없지만 정성과 인내가 필요한 건강한 음식을 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고루하게만 보였던 부모님들의 인생이 바림과 같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정성과 인내를 필요로 했을까. 그 인생은 스무드한 시간들이 쌓은 결과다. 이미 자체로 고품격 작품이었다. 이제 내가 바림을 할 차례다.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완성하고 보니 기대 이상으로 더 예쁘다. 그렇게 촌스럽게 보였는데 변하지 않는 건 없다. 특히 내 마음은 정말 많이 변했다.

*바림

명사 - 1. 미술: 색깔을 칠할 때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나타나도록 하는 일.


2. 미술: 그림을 그릴 때 물을 바르고 마르기 앞서 물감을 먹인 붓을 대어, 번지면서 흐릿하고 깊이 있는 색이 살아나도록 하는 일.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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