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도 괜찮아
계절을 옷 갈아입는 시기로만 알던 나다. 백화점 네온 사인을 사랑하고 쇼핑을 좋아하는 나는 타고난 도시녀다. 그런 내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이맘때가 되면 모종삽을 들고 너른 들판을 헤매고 싶다. 냉이랑 풀 구분도 못하면서.
서울을 떠나서도 한동안 아파트 생활을 했으니 도시를 떠났다고 볼 순 없었다. 아침에 눈 뜨면 나가 밤늦게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지금도 사는 동네만 시골이지 생활은 매한가지이다. 도시를 떠난 건 맞으나 귀농도 귀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을 보는 순간 아, 나도 이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이사를 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마당과 주변 산세와 조용한 분위기는 완벽했다. 문제는 나였다. 그림 같은 집에 가장 불완전한 내가 들어오니 예뻤던 집은 점점 나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꽃이 피는지 지는지, 대추가 달렸는지 떨어졌는지 볼 새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여전히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전원주택에 사는 게 무색하다. 장담컨대 농사를 짓고, 예쁜 꽃을 가꾸는 건 저 좋아서 하는 일이지 절대 누가 등 떠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처음 이사 올 때 꽃이 만발하고, 방울토마토와 대추가 주렁주렁 달리고, 갖가지 쌈 채소와 가지, 오이가 심어져 있고, 잔디가 파릇파릇하던 마당은 서서히 죽어갔다. 풀이 점점 우거졌고 급기야 대문과 현관까지 그 짧은 길이를 서바이벌 게임처럼 정글 숲을 헤쳐가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원에 살며 여유 있어 보이는 건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숨은 부지런함이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다 못해 귀차니즘 끝판왕인 나에게 전원주택은 언감생심이었다. 더 큰 난관은 풀이 키만큼 자란 마당에 꼭꼭 숨어있는 개똥이다. 숨바꼭질을 어찌나 잘 하는지 보이지 않는 개똥을 나는 수시로 밟아 차 안에서도 똥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 힘들게 가꾸어 놓은 마당만 보고 덜컥 이사를 온 나는 자연의 일부로 살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맞다. 자연을 바라볼 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귀농이건 귀촌이건 하면 안 된다. 숨 쉬고 돌아서면 금방 폐가가 되어 버리는 마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중행사로 한 번씩 풀을 베고 나면 아이고, 아이고 앓기 일쑤다. 첫해 감탄하며 주렁주렁 열린 대추를 욕심껏 따서는 몽땅 썩힌 뒤로 눈길도 안 준다. 동네에서 제일 화려하게 봄을 알리는 목련도 언제 폈다 지는지 모르게 살았다.
그런데 그런 내가 요즘 자연에 파묻혀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상상을 한다. 마당에 불이 크게 나면서 잔디를 다 없애고 현무암 판석을 깔았는데 10년을 살면서 한 번도 예쁘다 예쁘다 못한 것이 그제야 마음이 서렸다. 서성 서성 마당을 돌며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내가 왜 이렇게 사나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텃밭도, 꽃밭도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에 안달이 나 결국은 땅을 조금 남겨 놓았다.
쌈 채소와 방울토마토는 꼭 사야지. 아, 블루베리도 심을 거야. 상사화랑 수선화도 뿌리를 얻을 수 있으니 그것도 심고. 파도 심어 먹을까? 머릿속에선 이미 예쁜 꽃밭을 돌고 싱싱한 텃밭에서 바구니 들고 찬거리 채소를 꾸리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관심을 두니 모든 게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오가며 보니 땅들을 다 갈아엎고 비료를 뿌렸던데 나도 해야 하나, 비료를 어디서 사지, 쌈 모종부터 사야 하는 건가, 생각만으로 계획은 천리장성이다.
한 날 밭에 보이는 파릇한 것이 파는 아닌데 뭘까 궁금해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었다. 저게 뭐예요? 묻는 내게 어르신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이런 이런 감탄사를 되풀이하며 다시 내게 물으셨다.
“이런, 파는 알우?”
양파 잎이 길게 자란 걸 본 적이 없던 나는 양파 잎이 땅속에서부터 길게 자란다는 걸 미처 생각 못 했다. 그다음부터 어르신은 나만 보면 저 멀리서도 새댁, 새댁(아니 내가 나이가 몇인데 새댁이라니!) 큰 소리로 불러 세워서는 이건 알우? 저건 알우? 가르쳐 주시기 바빴다. 나는 지금도 그 분만 보이면 멀리 피해 다닌다. 모르는 게 창피해서가 아니라 새댁이라고 불리는 호칭이 창피해서다. 어찌나 큰 소리로 부르시는지.
꽃이 예쁜 채소들을 골라서 심어봐야겠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가꾸는 밭에 예쁜 꽃들이 많이 핀 걸 보고 한참이나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 와 치커리 꽃을 그렸다. 꽃이라 칭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겠다. 꽃도 보고 건강도 챙기고 일석이조를 누리려면 몸을 바지런히 놀려야 하는데 아직 생각만 바지런한 나다. 먹지 않아도 꽃이 이리 예쁜데 화단가꾸기로도 금상첨화인 치커리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