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발가락
손가락을 좍 펴 책상에 올려놓았다. 손등에 거뭇거뭇 반점이 눈에 띈다. 두꺼워진 관절과 손톱 주변에 지저분한 거스러미가 잔뜩이다. 정리 좀 하고 나올걸. 창피했다.
아주 오래전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책과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하다가 대뜸 작가는 청중들을 향해 물었다. 왜 여자들은 손톱 소지를 하느냐고. 바짝 깎고 쌀을 씻으면 저절로 손톱 때는 빠지는데 살림은 안 하고 왜 소파에 앉아 손톱 때를 빼고 자빠졌냐며, 그것도 돈까지 주고 지랄을 한다고 했다. 처음엔 우스개 소리인 줄 알고 다들 웃었다. 하지만 안 해도 될 이야기를 길게 끌자 좌중은 점차 조용해졌고 오늘 집에 가면 다들 쌀 박박 씻어 밥을 하라는 명령엔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 소리가 새 나왔다. 하아, 지랄하고 자빠진 채로 대중 속에 숨어 있던 나는 손을 좍 펴 무릎에 올려놓고 빨간 내 손톱을 바라보며 소심하게 그에게 한마디 했다.
'진짜 지랄하고 자빠졌네!'
얼마 전부터 나는 오른 손가락이 저려 고생 중이다.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통해 온갖 치료를 다 해도 소용이 없다. 몇 군데 신경이 복합적으로 눌리는 것 같다고 했다. 하필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는 특정 자세에서만 심하게 저려 약이 오른다. 멀쩡하다가도 순식간에 손가락 끝까지 마비가 오면 무력하게 손을 내린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싸울 틈마저 주지 않는다. 결국 양방 한방으로 매일 제 집 드나들 듯 출근 도장을 찍는 중이다.
오늘은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내게 의사는 침을 꽂으며 말했다.
"훈장이에요. 이 작은 손으로 얼마나 열심히 일해요 우리. 살림하고 일하고 애들 키우고. 어쩔 수 없지요, 아플 수밖에. 남자들은 잘 몰라. 그러니까 아프면 병원 가 하면 끝이지. 우리가 잘 달래가면서 써야지 어떡하겠어요."
우리 여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가정에 우리가 없으면 얼마나 엉망인지, 언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사선생님은 쓸데없는 수다를 떨어주신다. 듣다 보면 우습게도 위로가 된다. 열심히 안 살았어도 열심히 산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께 쓸데없는 농을 던졌다.
"제 손에게 너 예쁘다 예쁘다 네일 아트라도 해줄까 봐요.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예쁘게 치장하고 나서라고요. 언제 매니큐어를 발라봤나 기억도 가물가물해요"
좋은 생각이라며 유쾌하게 대꾸해 주시는 목소리에 나까지 덩달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한참을 엎드려 침을 맞고 물리치료와 찜질까지 하는 동안 생각했다. 발가락도 아픈데 이참에 이것도 침을 맞아야겠다. 그리고 다 나으면 네일아트를 해야지. 화려하게 손톱, 발톱을 치장하고 뜨거운 여름을 뜨겁게 맞이해야지. 간만에 돈 내고 지랄하고 자빠져서 햇반으로 밥도 해결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자 나는 막 웃음이 나면서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올여름엔 티도 안 나게 고생한 나의 손가락, 발가락에게 훈장 수여식을 해야겠다.
온전치 못한 발가락과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은 우리들의 인생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