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커피는 운명이다. 아기를 낳고 밤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약이자 위로였던 커피가 식량까지 된 건 그때부터였다.
통으로 잠을 자지 않는 건 갓난아기라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유치원을 들어가서도,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아이는 밤잠을 통으로 잔 적이 없다. 항상 등에 업고 있거나 배 위에 올려놓아야 했고 잠이 푹 든 것 같아 내려놓으려고만 하면 바로 깨서 울었다. 조금 크면 낫겠거니 기대를 했지만 이번엔 성장통이다. 밤새 팔다리를 주무르느라 졸다가 신음 소리가 나면 꾹꾹, 졸다가 울면 꾹꾹 자동인형이 따로 없다. 밤새 주물러 줘야 했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성장통은 더 심해졌고 팔목까지 아파 글씨를 못 쓸 정도였다. 아이도 괴로웠겠지만 나도 죽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잠을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었을까. 중학생이 되자 나아지긴 했다. 한 번만 도와주면 되었으니까. 그 한 번이 언젠지 몰라 내내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축구를 좋아해 매일 새벽부터 뛰던 아이는 잠은 잘 잤지만 이번엔 깨질 못하고 잠결에 화장실을 간다는 것이 피아노 앞이나 책장 앞, 아무 데나 가서 바지를 내리는 게 아닌가! 3년 내내 아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화장실 변기 앞으로 소몰이하듯 몰아줘야 했다.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심해도 너무 심한 커피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믹스 커피만 마셨는데 달달함과 적당한 커피 맛이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내게 안정을 주는 느낌이었다. 아이 나이만큼을 마셨으니 양으로 치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피를 타는 것으로 시작해 노상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을 정도였으니 하루에 10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을까 싶다. 잠을 못 자 늘 입맛이 없고 몸도 힘드니 피곤에 절어 그저 커피로만 연명을 했었다. 집중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릴랙스를 위해 마셨던 것 같다. 커피 믹스는 삶의 낙이자 쉼이었다.
미국에 사는 시이모님이 오셨다. 몇 년에 한 번씩 오시면 가이드 아닌 가이드가 되어 따라다니느라 바쁠 때였다. 미국에서 미용실을 운영하시는데 숍 안에 마사지실과 네일도 있어 한국에서 기술자를 데려가셨다. 그 기술을 보시기 위해 데려가는 모델이 나였다. 강남에 가서 마사지를 받고, 그 옆 동네로 옮겨 네일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했다. 너무 피곤해 커피가 마구마구 당기고 있을 때 식사를 하고 잠시 쉬던 중에 이모님이 커피를 찾는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식당마다 있는 커피 자판기만 눈에 띌 뿐이다. 시이모님은 아주 고상하고 품격 있는 분이라 싸구려 믹스커피 같은 건 안 마시는데 어쩌나. 그래도 나는 마셔야겠기에 혹시 모르니 두 잔을 뽑아들고 시이모님께 아무 말 없이 내밀었다. 그런데 시이모님, 아주 감격스럽게 물으신다.
" 윤경! 어디 커피가 이렇게 맛있니?"
지금은 믹스커피를 끊었다. 삶의 낙이 사라져 한참이나 괴로웠다. 당뇨병 유전적 고위험군이라 믹스커피는 끊어야만 한다. 대신 커피처럼 진하게 보리차를 끓여 마시는데 커피만 못하다. 당시 피곤에 절어 물처럼 밥처럼 마시던 커피를 예쁜 커피잔에 우아하게 마셔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림이라도 예쁘게 잔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자투리 종이를 꺼낸다. 두루마리 종이를 쓰고 나서 남는 종이를 작게 사이즈별로 정리해 모아둔 것이다. 간단한 엽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고체 물감 키트도 함께 꺼낸다. 원데이 수강생들이나 혹은 내가 이동하면서 편하게 그릴 때 쓰는 물감이다. 붓도 물감 크기에 맞게 작은 붓을 꺼낸다. 작고 아담한 부엌에 잔을 하나 그릴까 하다가 그냥 컵만 쌓는다. 예쁜 살림을 모으는 분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늘 해서 그런지 컵을 예쁘게 쌓아놓고 싶다. 나는 컵도 다 짝짝이, 숟가락 젓가락도 다 짝짝이, 뭐하나 예쁜 살림이 없다. 정리 정돈이 안 된 내 모습과 살림이 똑같아 보여 창피하다. 짝짝이라도 그림이니까 예쁘게 컵을 그려봐야지. 0.5 라이너 드로잉펜으로 낙서하듯 대충대충 그려준다. 라이너 드로잉펜은 어반스케치펜이라 물이 닿아도 번지지 않는다. 엽서 그림은 보통 두 가지 느낌으로 그릴 때가 많다. 아주 섬세하거나 쓱싹쓱싹 대충 그리거나. 이번 그림은 대충대충 그림이다. 색칠도 대충대충 해야 맛이 난다. 그래, 좀 대충대충 그리듯 인생도 대충대충 살아도 될 때가 됐지뭐. 시이모님은 아직도 그 커피가 자판기 커피인 줄 모르시고 자주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윤경이가 그때 아주 맛있는 커피를 사다 주었다고. 까다롭고 성격이 대충이 없는 시이모님이 모르고 맛있게 드신 자판기 커피가 그날 피로를 잊게 해주었듯 그냥 좀 대충 살아도 큰 탈이 없는 건 너무 힘들게 지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한다. 대충대충 그린 그림은 유치한 색으로 역시나 대충대충 색을 입혀야 제 맛이다.
아르쉬지 13*18.5 수채화고체물감키트
여태 커피가 나를 살게 했듯 커피를 끊어야만 이제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는 것도 운명이다. 예쁜 컵 하나 사서 보리차를 따뜻하게 마시면 왠지 아름다운 사람처럼 느껴질 것만 같다. 아, 보리차라니! 너무 건강한 느낌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