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넘어오지 말라고 했지! 이제 이건 내 거야! 암팡스럽게 대들며 따지는 소리를 향해 일제히 반 친구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나무가 움푹 파이도록 칼로 여러 번 그어댄 선이 흉터처럼 책상 가운데 선명하다.
초등학교(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때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교실 맨 뒤에 손들고 무릎 꿇고 앉아 독기를 내뿜으며 째려보던 아이. 벌을 서면서도 누군가 고개만 돌려도 뭘 보냐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가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는 눈초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었다. 어느 날은 연필이, 어느 날은 지우개가, 또 어느 날은 필통이 선을 넘었고 그럴 때마다 선 넘지 말라며 쇳소리를 냈다. 작은 책상에서 반을 가른 선을 넘지 않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점차 그 선을 넘는 아이들이 줄어 갔다. 나중에는 짝이 여러 번 바뀌어도 그 선은 지켜졌다.
나는 그 아이를 오십이 넘어 떠올렸다. 얼굴도 잊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선을 넘지 말라던 그 아이의 선이 자꾸 생각난다.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선을 지키며 살고 있을까 많이 궁금하다. 인생을 살면서도 확고한 자기만의 기준선이 있을까. 아무도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아직도 자기만의 영역을 지키며 살고 있을까. 말도 못 하고 혼자 기분이 상할 때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선이 보인다. 그리고 혼자 소리 내 본다. 선 넘지 마! 그저 어린 치기였을 수도 있고 관심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못된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야. 여기서 더 선을 넘으면 침범이야.
나는 중학교 때 입시 미술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잘 그린다는 소리도 듣고 상도 좀 탔기에 미술 학원을 가면 바로 멋진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종일 선만 긋다 집에 가기를 반복했다. 0교시를 하던 때라 새벽부터 학교에 가야 했고, 야간자습 대신 앉을자리가 없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서서 미술 학원을 다녔다. 도착하면 바로 이젤에 화판을 올린다. 2절 켄트지를 고정하고 4B연필을 꺼내면 그때부터 무한이다. 가로, 세로, 사선, 짧은 선, 긴 선, 흐린 선, 진한 선, 그러데이션 등 선도 다양했다. 곧고 길게, 같은 굵기와 같은 힘으로 긋는 기본선부터 시작해 강약 조절에 신경을 쓰며 연필이 지나가는 마찰을 느낀다. 선 끝이 맺히지 않게 자연스럽게 빼주는 방법도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손목을 쓰면 둥글게 휜 선이 나오기 때문에 어깨를 움직여야 한다. 왔다 갔다 백지를 꽉 채우고 나면 한쪽 팔이 뽀빠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람, 이게 무슨 그림이야, 선이나 긋자고 왔나 한숨이 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 선 긋기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아주 탄탄한 기본기가 됐음을 두고두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선을 넘으면 형태가 망가지고 명암이 뒤바뀌고 그림이 지저분해진다. 선에도 성격이 있어서 그림에 따라 다 다른 선을 사용하는데 살면서 지켜야 하는 선들도 그림과 똑같아 보였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면 인간관계뿐 아니라 때로는 삶이 망가지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나가야 할 곳을 잘못 지나가 형태가 바뀌거나 찌그러지거나 뭉그러지는 그림을 바로잡으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지우거나 다른 그림으로 애초 계획을 바꿔야 한다. 가장 사소한 선 긋기가 되지 않으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사람 사이도 그랬다. 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적당한 때에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면 어릴 때 흉터처럼 보이던 나무 책상의 선이 사람 마음에도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아이가 자주 생각났다. 그땐 너무하다고 생각했었다. 좀 넘을 수도 있지, 뭐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굴까 싶었는데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아주 뒤늦게 들었다. 난리를 치던 반 친구들이 나중에는 그 아이가 정한 선을 넘지 않았고 저절로 우리 반 약속이 되었었다. 그 약속은 잘 지켜졌고 반에서는 더 이상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자리는 그 아이의 자리가 맞았고 그 아이도 선을 넘어 다른 아이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았다.
살면서 적당한 선을 긋는 것이 어려웠다. 까칠하다고, 성질이 못됐다고 수군대던 아이들이 결국 당연하게 받아들였듯 처음부터 선을 긋는 것이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선을 넘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선은 결국 사라져 버린다. 흉터 같았던 책상의 선이 사람의 마음에 생기는 것보다 차라리 까칠한 게 낫다. 열심히 긋고 또 긋던 선 연습을 내 인생에서도 했어야 했다.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바로 선 하나 긋는 것부터 시작이 아닐까.
종이에 그은 선 하나는 우습지만 그 선에서 그림은 완성을 향해 출발한다. 나도 나에게 필요한 새로운 선 하나를 뒤늦게 긋는다. 여기까지야. 더 넘으면 내가 사라져. 그러니 너는 너를 만들어가, 나도 나를 완성해 볼게.
연필, 색연필, 하네뮬레 드로잉북 A4
여행을 갔다가 아주 오래된 나무다리를 보았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연필과 A4 드로잉북을 꺼낸다. 그 자리에서 잠깐 이렇게 스케치를 남기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그린 것 같지만 이 그림은 선 하나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