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산자락 아래 산 지 올해로 17년째를 맞는다.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움푹 들어간 형상인데 마을로 통하는 길이 하나인데다가 편의시설도 없기 때문에 마을 안으로 외부인이 들어올 일은 거의 없다. 아직도 읍이 있냐고 묻는 주소를 가지고 있는 이 동네는 20가구가 다다. 그야말로 숲속에 사는 것 같아 완벽에 가까운 전원마을의 모습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오래된 시골집보다 새로 지은 집이 더 많다는 것이다. 땅콩주택이 한참 유행할 때 길을 가운데 두고 양 갈래로 이어 지은 집들이 알록달록하게 색을 칠하고 꾸며놓아 마을 전체 분위기를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놓았다. 2층으로 지어진 이 땅콩주택에는 젊은 부부들과 부모님이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집들은 주로 낮 시간에 집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마당에 꽃도 심고 텃밭도 만들어 가꾼다. 그 덕에 마을은 더 예쁘고 더 깨끗하다. 요즘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완벽하게 그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이 전원마을에서 나는 자연과 동화되지도 못하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 어미 잃은 새처럼
그저 오랫동안 숲속에 버려진 기분만 가득했다.
자연이란 것이 잠시 경험으로 즐길 때는 참 좋다. 나도 그랬다. 놀러 다닐 땐 새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렸고 MT를 가서는 차가운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산과 물이 있는 오솔길을 산책하면 더없이 완벽한 모습이 연상되곤 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부부가 여유롭게 손을 잡고 숲길을 거니는 행복한 가정 말이다. 자연을 멀리서 바라볼 땐 풍경이다. 하지만 그 풍경 안으로 내가 들어가면 일상이 된다. 새벽이면 새소리가 얼마나 크고 시끄러운지 시장 바닥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자그마치 새벽 4시부터 들린다. 거기다 밤마다 꽥꽥 대는 개구리, 맹꽁이 소리는 또 어떻고. 진짜 누가누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나 시합이라도 하는 듯 자려고 누우면 나도 소리를 빽 지르고 싶을 정도다. 특히 나는 폭풍우가 몰아칠 때면 자연에서 산다는 걸 가장 실감한다. 비바람에 숲속 나뭇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꼭 산이 우는소리처럼 때로는 귀신 소리처럼 들려서 너무 무섭다.
소리도 소리지만 왜 멀쩡한 산이 무너질까 그리도 걱정이 되는지 걱정 병 환자가 따로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최고로 환장하겠는 건 마당이다. 조금이라도 그냥 두면 풀들이 무섭게 자라는데 비가 오고 나면 완전 정글 숲을 헤치고 가자~노래에 딱 어울리는 풀숲이 되고 만다. 산책은커녕 일부러 짬을 내 마당 풀을 뽑아내지 않으면 금방 폐가가 되어버리는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 말이 자연에, 내 삶에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다.
작물을 심어 맛있는 먹거리를 나눠 먹는다거나 마당에 꽃을 심어 예쁘게 가꾼 다거나 집을 조금씩 매만지는 취미가 내게도 있었더라면, 조금만 부지런한 사람이었더라면, 깔끔한 성격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침에 나가 밤늦게 들어온다는 핑계가 한 몫 하는 속사정은 그냥 내가 천성이 게으르고, 자연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포장하는 것 뿐이다. 나는 병풍처럼 숲이 둘러쳐진 예쁜 마을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자연에 관심이 없고 또 살아보니 그나마 환상도 깨져 짜증만 늘어갔다. 그렇게 아주 오래오래 도시인도 아니고 자연인도 아닌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잠만 자고 다녔다. 하지만 나만 빼고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자연살이의 재미를 만끽하는 듯하다. 그래서 말인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무려 자연살이 17년이나 되었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자연과 친해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화려한 불빛의 백화점 쇼윈도를 사랑했고 복잡한 빌딩 숲과 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는 것이 더 편했던 나. 그런 내가 자연 ~스럽게 자연에게서 위로를 받기 시작했고 서울이 어느새 점점 잊혀 가고 있다.
얼마 전 <타샤 튜터>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가 요즘 오락가락하던 내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타샤의 지혜로운 삶의 태도가 너무나도 아름답다.
텃밭에서 키우는 작물들을 이용해 천천히 오래 걸려 만들어 먹는 간단한 음식들, 느리게 조용하게 사는 자연 주의적인 일상. 타샤의 행복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쑥 들어온다. 영화는 내내 집과 정원만 보여주는데도 감동이 대단해서 당장 마당으로 나가보았다. 흉내를 내본다. 조용하게, 아주 천천히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힘이 강하게 느껴지던 타샤의 단단함. 최대한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맹꽁이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마당에서 산을 바라본다. 그렇게 무섭기만 하던 산이 우는소리도 어느새 초연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진짜 인간이 되는 거라고 항상 생각했는데 나는 이제 진짜 인간이 되려나 보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자 행복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행복이 따라 들어오자 뒤이어 예쁜 내가 다가온다. 그래, 조금만 예쁘게 살아보자 자연이 말한다. 그러면 삶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질 거야. 바람이 살살 나를 어루만진다. 비가 와서 쑥 자란 풀들을 내일 뽑아야지. 그리고 이제 조금씩 예쁜 자연인이 되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