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알

행복 연륜

by 이윤경


그림 주문은 잘 안받는다. 대신 그려놓은 그림 중에 가져가시라고 권하는 편이다. 원하는 그림과 내가 상상하는 그림이 일치하기는 어렵다. 마음대로 그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감안해서 주문을 하겠지만 문제는 나다. 걱정이 많아 그리는 내내 힘들다. 인터넷에 주문 제작해주는 곳이 많다고 안내하는 내게 뼈때리는 농담을 건넨다. 돈이 많으신가 봐요.수업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골라 하는 걸 보고 동생은 한숨을 쉰다. 누가 보면 겁나 부잔 줄 알겠다며.




날이 좋아 볕이 따사로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부부 두 분이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다짜고짜 보리밭을 그려달라 신다. 매일 통유리 너머로 작업하는 과정을 보며 달라지는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에 열심히 산책을 하셨단다. 감사했지만 난감했다. 보리가 뭐지? 물론 보리차는 알지. 그런데 보리밭을 그리려면 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라야 하는데 퍼뜩 생각이 안 났다. 상상되는 그림이 없다. 보리가 어떻게 생겼더라? 기억을 더듬어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보리를 모른다. 그래서 그릴 수가 없다. 하지만 대답이 꼼짝을 못하게 한다. 요즘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데 뭐가 문제냐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들이 그 보리밭 그림을 보면 참 행복할 것 같다며 죽기 전까지만 그려달라신다. 봉투에 이미 담아오신 계약금을 두고 안 받으려는 나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림을 보고 결정을 하시라는 내 말을 뒤로 하고 돈을 던지다시피 버리고 나가신다. 아참, 난감하네 난감해.




폭풍검색이 시작됐다. 편의점에서 보리차도 사왔다. 포장지에 보리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보리의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관련 수필도 읽어본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한흑구 작가의 보리 중에서-




노부부는 보릿고개를 겪었을까. 가난의 상징이던 보리가 그분들의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을까. 아직 수확하려면 먼 초록빛보다, 무르익어 금방 수확할 수 있는 황금빛 보리밭을 그려드리고 싶었다. 이제서야 머릿속에 그림이 보인다. 나는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앞부분만 자세하게 보리의 생김새를 그려주고 바로 물감을 꺼낸다.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노란색 물감의 절반을 짜내 작은 물통에 아예 노란 물감물을 만들었다. 커다란 평붓으로 종이 전체를 노란색으로 한번 칠해 노란색 종이를 만든다. 3칸으로 나뉘어진 물통에 하나는 노란색물을 만든다. 붓 하나에 노란색 물감물을 조금씩 묻혀가며 밑색을 칠한다. 또 하나의 붓으로 같은 계열의 색들을 조합해 명암을 만들고, 가는 붓으로는 낱알을 그린다. 다시 8호 붓으로 색을 정리하고, 깨끗한 붓으로 색의 한 쪽을 살짝씩 지워낸다. 붓 세 개를 동시에 잡고 그리고 칠하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낱알 하나하나가 소중했을 보릿고개를 생각하면서 배고플 때 땅에 떨어진 낱알을 귀하게 찾는 모습. 아이를 먹이려고 최선을 다하는 엄마와 아빠를 상상했다. 굶주린 배에서 꼬륵꼬르륵 나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작은 아이들도 떠오른다.




노부부가 내 상상과는 다르게 배를 곯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을 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을 거라는 짐작은 아마도 맞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의 세대는 먹고 살기 바쁜 세상이었으니까. 지금 우리는 적당히 끼니를 떼우고 맨날 언제 밥 한번 먹자며 신소리를 하고 너무 먹어 병이 생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 밖만 나가면 편의점과 식당이 즐비하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밀가루를 끊고 탄수화물을 줄이라는 정보가 쏟아진다. 불과 100년도 안 되어 100세 시대가 되었다. 먹을 게 넘치는 세상이다. 정말 빠르게 변한 세상의 속도는 점점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그림을 그리면서 나래를 펼친다.




노부부는 여전히 산책을 하시며 작업실 앞을 지날 때마다 통유리를 통해 보리밭 그리는 과정을 보셨다. 들어오시라고 문을 열어드려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시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일부러 더 잘 보이게 항상 밖을 향해 그림을 놓고 그렸고 퇴근을 할 때도 통유리 바로 앞에 그림을 전시해 놓고 갔다. 가끔은 들어오셔서 보리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도 하셨다. 사실 보리밭에 대한 이야기보다 당신들 사연이 더 많았지만 조용한 미소가 나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작은 행복을 알아야 감사도 알지 않을까 그분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낱알 하나하나에 그 마음을 넣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더 불행하고 더 우울하고 더 남들과 비교를 하며 박탈감을 느낀다. 그건 너무 큰 풍경만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낱알만 한 행복을 찾는다면 그 낱알들이 모인 풍경은 저절로 눈부시게 환해질 텐데. 나는 오늘 빛의 낱알을 찾았다. 행복을 느끼는데도 연륜이 생기는 것 같다.





수확이 끝난 밀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을 그린 밀레의 그림을 생각했다. 그 낱알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했을지 처음으로 깨닫는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은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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