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자신을 돌이켜 보건대 모든 행보의 시작은 아이의 탄생이었고 모든 행보의 멈춤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 시기 가장 순수한 이타심이 발휘되었고 가장 투명한 희생이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시기이기도 했던 그때 나는 자신이 자라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육아는 나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어라 고생은 내가 하는데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외롭고, 억울하고, 괴로워도 죄인 같아 맘대로 편하게 쉬지도 못한다. 주인공을 키워야 하는 엄마니까. 한 번도 엄마인 적이 없었던 나는 서서히 감정과 생각의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안으로 안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깜깜해진 사위가 눈을 가렸다. 두리번 대도 너무 어두웠다. 화들짝 놀라 다시 기어오른다. 상처가 나고 아프고 불안하고 두려워도 멈출 수가 없다. 멈추면 다 잘못될 것만 같아 무서웠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좀 더 따뜻하게 긍정적으로 아이와 함께 자라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을까. 어차피 가는 세월이었고 어차피 할 일이었고 어차피 내 인생이었는데. 어차피 그 시간의 주인공은 나였는데 왜 나는 나를 싫어하기만 했을까.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육아가 필요 없는 어른이 되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기억들은 시절을 따라 보이는 부모님과 무위도식하던 젊은 시절 나를 만나 내 인생이 얼마나 한심한지에 대해 부끄러움을 자극한다. 엄마도 나처럼 힘들게 육아를 하셨을 텐데 다 자라지 못해 몸만 어른이 된 것 같아 죄스럽기까지 하다. 자식을 다 키운 어른이 되어 이제 와할 생각은 아니지만 셀프 육아를 생각한다. 꼬리를 물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환한 빛을 본 것 같다. 그래, 내가 나를 키우자.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주는 거야. 이미 엄마가 되어 본 경험이 있잖아. 셀프 육아를 해 보자.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데는 글을 쓰는 행위 이상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내면을 구체화해 가는 과정은 나를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게 키워 줄 테니까.
유아기 언어 표현에 제약이 있을 시 그림은 훌륭한 표현 도구가 되기도 한다. 유연하게 저항 없이 자신을 표출하는 그림은 그래서 퇴행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기도 하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그 마음을 글로 적는 행위는 어쩌면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상처와 우울을 위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우면서 돌보지 못했던 내 영혼은 미처 성숙하지 못했다. 그림으로 치유하고 글로 커 나가는 <육아 같은 동행>이 셀프육아의 문을 쉽게 열어준다. 그림과 글이 동행하는 셀프육아는 깊은 내면에 평온을 가져다준다.
봄까치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기록이 남는다면 그 기록 안에 쓰일 기쁜 소식은 얼마나 될까. 만약 슬픈 소식이 더 많더라도 그 슬픈 소식 안에는 또 작고 하찮은 기쁜 소식들도 함께 한다는 걸 알 고 있다. 봄이 코앞에서 간지럽힌다.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모ㄷ에게 육아 같은 동행을 하자고, 그래서 우리 무럭무럭 커나자고, 각자의 셀프 육아를 응원하자고 말이다. 각자의 인생 책갈피 어디쯤 우리의 동행을 봄까치꽃과 함께 끼워 넣자고. 이 글로 이 그림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