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 속에서

행복

by 이윤경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완전무장을 한다. 빨간 목도리라면 더 좋겠다. 동화책에 고구마가 등장하면 꼭 누군가 빨간 목도리와 빨간 장갑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날씨는 추워야 하는데 입김을 호호 불 정도라야 제 맛이 난다. 날도 환하면 안 된다. 퇴근할 때 즈음이 딱 좋은데, 더 좋은 건 누런 봉지에 고구마가 가득 담길 때쯤 가족 중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따끈따끈한 것을 봉지째 그의(혹은 그녀의) 차가워진 외투 안으로 쑥 밀어 넣어 주고 나는 두 손으로 매달리듯 팔짱을 낀다. 그것은 종일 이별했다 만나는 반가움을 대신 표현해 주는 쑥스러운 몸짓이다. 봉지를 가슴에 안은 그(그녀라면 어깨에 팔을 두르고)의 팔에 매달려 몇 발작 떼면 차츰차츰 가슴에서 배꼽 주변까지 따뜻한 기운이 파고든다.

달콤한 내음도 이내 알아채기 시작한다. 그러면 팔짱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누런 봉지를 조금 열어 작은놈 하나를 골라 들고 찐득한 달달함을 손가락에 묻혀가며 추운 줄도 모르고 고구마 껍질을 벗긴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는 미소가 흐르고 행복이 차오르는 밤이다. 고구마를 한 입씩 베어 물고 고개를 들면 밤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거린다. 우리는 눈을 마주 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같은 마음이란 걸. 입 안에 가득한 것은 달달한 고구마보다 더 달콤한 행복이다. 팔짱 긴 손을 더 꽉 잡아당겨 안는다.

추억이 가득한 풍경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진짜 기억인지 각색인지 모르겠지만 그 기억은 맛을 떠올리게 만든다. 군고구마는 유난히 추운 날 유난히 달콤하고 유난히 따뜻했던 것 같다. 드럼통에 구멍을 뚫고 리어카에 실은 군고구마 통이라야 진짜 군고구마 맛이 나는 것 같다. 꿀이 떨어지는 고구마를 담아주는 봉지도 누군가 풀칠을 해서 만든 것 같은 허접한 봉지라야 더 맛있게 느껴진다. 아직 덜 익어 좀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멀뚱멀뚱 서 있으면 통 가까이 다가와 손이라도 녹이라며 잡아끌던 고구마 장수. 연신 고구마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뒤집으면서 익었을까 확인하면서도 큰 소리로 고구마 사세요를 외치는 소리. 이제 드럼통으로 만든 군고구마 통에서 오래오래 익어가던 그 맛과 풍경은 과거 속에 남았다. 그 맛은 지금 흉내를 내려고 해도 나질 않는다. 추운 날 발을 동동 구르며 익기를 기다리던 군고구마. 호호 불며 먹던 것은 어쩌면 행복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