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닮았갰어
조명은 정확하게 아들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봐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금세 불빛이 꺼지고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아주 강렬한 독무대였다.
노래를 많이 듣는 내 유튜브 알고리즘이 블랙핑크 제니를 첫 화면으로 띄운다. 헐렁한 검정 가죽 재킷에 하얀 브라넷을 입고 바지를 허리 아래로 한참 내려 입어 하얀 팬티까지 다 보이는 옷차림이다. 일명 제니 샤넬 란제리 새깅룩이다. 언론이 만드는 유난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 옷차림은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패션이다. 샤넬이니까, 제니니까 가능한 옷차림을 연예인도, 패셔니스타도 아니면서 입는 건 아주 많이 곤란하다.
자주
요란한 옷차림과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 속이 뒤집히곤 한다. 네가 창피하지 내가 창피하니 주문으로 내 마음을 분리시키는 기술을 연마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들의 패션 감각은 일찌감치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작은 해골이 빙 돌아 달린 허리띠를 청바지에 몇 개씩 두르는 정도였다. 귀여웠다. 센스 있네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들의 해골은 사춘기 지랄병 초기 증상에 불과했고 날이 갈수록 요란하고 과감하고 해괴해지는 아들의 멋 내기는 노상 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너무너무 꼴 보기가 싫었고, 화가 났다. 힙한 아들은 매번 집을 나설 때마다 나와 암묵의 신경전을 벌였고 그런 아들 덕에 사람을 위아래로 재빠르게 스캔하는 신기술까지 터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제니여도 마찬가지다. 노래가 들리질 않는다. 열심히 무대를 뛰어다니는 제니 옷차림만 보였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면서 안도감이 든다. 딸이 아니길 얼마나 천만다행인가.
자주
나는 귀를 기울이고 눈알을 굴려가며 아버지 인기척을 쫓았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딱 붙는 윗옷과 진한 손톱, 진한 화장을 즐기던 나는 아버지의 핫한 딸이었다. 아버지에게 걸리면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현관에서 대문까지 잡히지 않고 뛰쳐나가는 게 일이었다. 마당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가방과 구두를 든 채로 마루를 서성이다 기회가 포착되면 딥다 뛰었다. 그날도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쏜살같이 신발을 꿰차고 달렸건만 아버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하이힐을 신었던 지라 대리석 계단을 뛰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 목덜미를 잡고 다시 몸의 방향을 돌려 밀었다. 마구 신경질을 내며 왜 안 되냐고 소리를 지르는데 아버지는 조용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똥꼬 보인다.
자주
그때 아들 바지도 그랬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똥꼬가 보일 것만 같았다. 늦은 저녁 사물놀이 공연 연습이 있는 날이었고 11명이 한 팀인 연습생들을 부모들이 번갈아 태우고 다녔던 터라 집 앞 도로까지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선 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함께 하던 팀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공연이라도 있는 날엔 부모들이 나서서 옷이니 차량이니 다 공수를 하던 때였다. 주말 공연을 앞두고 저녁마다 연습을 했었다. 복잡하지 않은 도로에서 픽업을 하기로 한지라 어두운 도로에 혼자 내보내기가 불안해 같이 집을 나선 참이었다. 바지를 한참 아래로 내려 입은 새깅룩 차림으로 나선 중학교 1학년 아들이 나는 못마땅해 이미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간색 이너 팬츠가 보이게 바지를 입고 걷는 아들. 한 번씩 쳐다보며 한 마디 할까 말까 내내 속이 시끄러웠다. 어휴, 교복 바지를 안 내려 입는 게 어딘가 스스로 위안을 하며 입을 다물기로 했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어차피 연습실만 다녀올 건데 뭐 생각하며 켜지는 신호를 보고 앞서 걸었다. 차 한 대가 정차하는 소리에 뒤따라 오던 아들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아주 잠시 잠깐이었다. 환한 불빛에 바지가 흘러내려 벗겨진 채로 팬티만 입고 서있는 아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표정, 숨조차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확대경처럼 커다랗게 아들 모습만 보였다. 깜깜한 저녁이었고 가로등도 없는 외진 장소였고 차는 그 넓은 도로에 딱 한 대가,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아들을 밝게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운전자는 센스 있게 바로 등을 꺼주었지만 띠리리~이미 때는 늦었다. 바지를 끌어올려 부여잡고 쏜살같이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오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빵 터져 거의 실신에 가까울 정도로 꺼이꺼이 울면서 웃었다. 진짜지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숨이 넘어가게 웃으면서도 나는 눈물을 훔쳐 가며 띄엄띄엄 기어이 하고 싶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똥꼬 보인다 했지 내가.
동네에 아주 큰 대형 빈티지 숍이 생겼다. 나는 옷을 아주 좋아한다. 직업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느라 마음대로 입고 다니지는 않지만 퇴직을 하고 공방을 다시 열게 되면 그땐 마음대로 입을 생각에 설렌다. 시간만 나면 창고에 가 옷을 뒤지는 재미가 요즘은 쏠쏠하다. 뒤적뒤적 구경을 하면서 왜 내 아들은 그런 옷을 입는지 모르겠다고, 그 수준을 어떻게 정신 차리게 만드냐고 동생에게 푸념을 했더니 동생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흘기며 나를 비웃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이런다. 웃기시네, 아버지가 맨날 언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우라고 했지, 딱 그 아들이지 뭐야. 누굴 닮았겠어.
힙하면 어떻고 핫하면 어떠랴. 나는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똥꼬가 보이는 옷도 한때다. 한 철 살기를 쓸데 없는 것으로 속 끓이고 싶지 않다. 아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힙하고도 핫하게 살 궁리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환갑 기념으로 아들과 새깅룩 커플 프로필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리 모자만의 힙핫 독무대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