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

취미 부자

by 이윤경

타고났다. 나는 술고래다. 굉장히 잘 마신다. 한 번도 끝까지 마셔본 적이 없어 주량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취기를 느낄 정도가 되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다.



예전에 아들이 대학 시험이 끝나자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었다. 한창인 남자애들의 치기 어린 마음이 엄마를 연약한 여자로 보이게 만들었나 보다. 남편은 아예 술을 입에도 못 댄다. 그래서 더 남자답게 아들은 엄마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아마도 엄마 역시 술을 잘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도 엄마가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는 데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상무를 하다시피 했어도 취해서 귀가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빠의 경고에도 아들은 자신만만했다. 사물놀이 선생님께 들은 말이 있어 나는 남편에게 귀띔을 했다. 술은 어른한테 어려운 자리에서 배워야 한다고 선생님들이 일부러 불러서 한 잔씩 줬다는 이야기를 전했더니 남편은 나에게 눈을 찡끗하며 아들을 향해 말했다.



"아들아, 엄마를 이기면 평생 네 술값은 아빠가 책임진다!"



남편은 술에 대해서는 서운할 정도로 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남편 친구들과의 술자리 술상무는 나였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자리를 해도 모두 다 취할 때까지 상대를 하고 끝마무리를 했다. 사실은 내가 멀쩡한 건 아닌데 남들 눈에 취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남편은 내가 무슨 해독 인간인 줄 안다. 취했다고 말을 해도 믿질 않는다. 심지어 아니야, 너 안 취했어라며 가스라이팅도 아니고 벅벅 우기는 건 도대체 뭔 경운지. 한 번은 술 때문에 별을 본 적이 있다. 실외가 아니라 카페 실내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귀여웠다면서 아직까지도 내가 그날 술에 취했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별을 본 날은 일찍부터 술자리가 시작됐었다. 함께 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중간에 합석한 사람들이 생기면서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 다녔고 굉장히 늦게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이 술 저 술 술도 많이 섞어 마셨다. 몇 차까지 갔는지 세는 걸 까먹었을 정도다. 남편은 술을 전혀 못하면서도 제일 취한 사람처럼 가장 신나게 논다. 나는 그게 정말 신기하다. 반면 나는 안 마시는 사람처럼 앉아서 조용히 술만 마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안 마시냐며 한 잔만 하라고 계속 술을 따라준다. 완전 반대 모습으로 술자리를 지키는 우리 커플을 친구들은 무척 재밌어한다. 남편 친구들은 진탕 마시고 놀고 수다를 실컷 떨어놓고도 또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시자며 카페를 찾았다. 내가 볼 땐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수다는 더 심한 것 같다. 끝나질 않는다. 나는 실내가 더운 데다가 커피를 뜨겁게 마시고 있자니 취기가 올라왔다. 찬 바람도 쐴 겸 화장실도 가고 싶어 자리에 앉은 상태로 고개를 들어보니 정면으로 화장실이 보였다. 슬그머니 일어나 똑바로 직진을 했다. 분명 나는 화장실 문을 향해 걸었는데 어딘가에 세게 쾅 부딪히면서 그만 그대로 나동그라져 바닥에 쫙 뻗고 말았다. 너무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수많은 별들이 눈앞에서 반짝반짝했다. 별이 진짜 보이는구나. 아, 이게 무슨 창피람. 남편은 왜 가만있는 벽에다 머리를 갖다 박냐며 깔깔깔 웃어댔고 나는 너무 남부끄러운 나머지 아픈 줄 모르고 벌떡 일어나 멀쩡한 척 밖으로 나가는 문이 어디냐며 재빠르게 그 자리를 피했다. 웃기는 건 남편 말고는 다 너무 취해서 그날 나의 쪽팔림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편도 내가 취해서 문을 잘못 봤다는 걸 믿지 않았다. 어쨌든 다음날 내 머리에는 커다란 혹과 함께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와 일주일을 귀한 보물처럼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다녀야만 했다. 그날 남편 말로는 내가 소주를 7병을 마셨다고 한다. 맥주에 양주에 막걸리까지 섞어 마셨으니 나는 남편과 남편 친구들에게 술에 대해서만은 신적인 존재다.


아들은 남자답게 소주를 한 병 주문했다. 아직 앳된 모습이 귀여웠지만 원래 저맘때는 자신만 모르는 거다. 나는 각 1병으로 시작하자고 제안했고 남편은 콜라를 시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 아들과의 술자리인 만큼 즐기고 싶었는데 아들은 너무 빨리 진도를 빼고 있었다. 술은 천천히 대화하면서 마셔야 안 취한다. 아들을 위해 최대한 속도를 조절해 보려고 했지만 엄마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는지 자꾸 빠르게 달렸다, 어쩌냐, 나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데. 아들 속도에 맞춰 각 1병을 끝내고 보니 아들 얼굴은 불타오른다. 모른 척 다시 각 1병을 주문했다. 하지만 곧 아들은 잔을 거꾸로 덮으며 엄마, 나 안 되겠다. 집에 가자 한다. 우리는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고 객기를 부리지 않는 아들을 칭찬했다. 아들은 엄마가 술을 하나도 안 마신 사람 같다며 신기해했고, 도전은 아주 싱겁게 끝났지만 나는 안심했다. 술은 잘 마시는 것보다 못 마시는 게 낫다.


얼마 전 권여선 작가의 <봄밤>을 읽었다. 알코올중독자인 영경과 류머티즘 환자 수환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그들의 사랑이 주제이지만 나는 영경의 알코올중독만 보였다. 힘든 현실에서 술이 아니라 다른 것에 중독이 되었다면 영경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나는 술 중독이 아니라 그런 중독자가 되고 싶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글을 쓰지 않으면 우울해지고, 책을 읽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취미 중독자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요즘 술 마실 시간이 없다. 매일 취미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다. 운동까지 하느라 정말 바쁘다. 지독하게 중독이 되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이런 취미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취미 중독자 할머니가 되어 취미 부자로 재미나게 사는 게 꿈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사는 중이다.


튤립은 색이 많은 만큼 꽃말도 다양하다. 경쾌한 색상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선물로도 참 좋은 꽃이다. 예쁜 색을 잔뜩 골라 칠한 덕분데 화사해진 튤립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지금 내가 딱 이렇다. 즐겁고 행복하고 편안하다. 다 취미 부자가 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