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심취해 있는 나를 보고 엄마는 저 미친년 또 시작이네, 귀신 나오겠다며 문을 닫았다. 엄마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 내가 하는 짓을 이해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 혼자 하던 나만의 취미는 아주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그래서 혼자 즐거웠던 취미였다. 그땐 몰랐다. 얼마나 행복했고, 얼마나 열정이 가득했으며, 얼마나 충분한 삶이었는지. 또 얼마나 완벽한 몰입이었는지 말이다.
방문을 열면 맞은편에 한 칸짜리 장롱이 천장까지 닿게 서있었다. 이 장롱 안에는 옷가지며 신발, 가방 등이 들어 있다. 있으나마나 한 열쇠로 열심히 잠갔는데 그대로 있는지, 누가 건드린 흔적은 없는지 매일 가자미 눈을 뜨고 살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날에는 집안이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누구 하나 경을 쳐야 끝이 났고 엄마는 제발 저 미친년 좀 건드리지 말라며 애원을 했다.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유독 나만 심했던 이유는 서러움이 폭발해서다. 둘째인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형제들에게 뒤처졌다. 언니는 첫째라 뭐든 새 거였고, 아래 동생은 몸이 약하고 순해서 챙김을 많이 받았다. 막내 여동생은 눈치가 빠르고 애교가 많아 어디서나 인기 만점이었다. 남동생, 말해 뭐 하나. 딸 넷을 내리 낳고도 포기하지 못했던 아들 선호사상이 낳은 노력의 결과였다. 집에서 네모난 장롱 한 칸은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 것, 나만의 영역은 딱 장롱 한 칸뿐이었다.
장롱 옆으로는 서랍이 많은 책상이 있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교과서나 참고서는 새 학기에 백화점에서 사 온 포장지와 비닐로 표지를 싸는 놀이용이었다. 깨끗하게 일렬로 꽂아 놓고 등교할 때만 가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내 책상은 공부용이 아니다. 서랍에 비밀이 있다. 자그마치 서랍이 6개나 달려 있었는데 그중 하나만 열쇠로 잠글 수 있었다. 정성으로 캔디를 베껴 그리고 주인공들을 친구들로 채워 대사를 만들어 가던 나의 보물 캔디 개작물과 비밀 일기장, 사연이 담긴 편지들과 엽서들이 우선순위로 열쇠가 달린 서랍장에 자리를 잡았다. 뽀뽀 인형 역시 빠질 수 없었는데 서로 갖겠다 형제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던 이 뽀뽀 인형은 아버지가 일본 출장을 다녀오시면서 사 오셨다. 입술을 종이에 누르면 뽀뽀한 입술 자국이 찍혔다. 바람피운 남편들 와이셔츠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모습을 생각하면 딱 그 입술이다. 나중에는 하도 눌러대서 입술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 날은 그게 징그러워 보여 쓰레기통 대신 동생 책상 서랍에다 넣었다. 못돼 처먹었다고 욕을 잔뜩 먹었지만 네가 갖고 싶어 해서 준거라는 당당함을 나는 잃지 않았다. 온갖 크기 별 예쁜 수첩들과 스티커, 다양한 메모지가 가득 찬 내 책상 서랍 속 문구들은 차곡차곡 항상 깔끔하게 보관했고 절대 쓰지 않았다. 수집용으로 모으기만 했다. 용돈이 생길 때마다 백화점을 참 많이도 다녔다. 그 결과 나의 서랍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팬시점을 방불케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하도 많아서 몰래 하나씩 꺼내 써도 내가 몰랐다고 한다.
장롱과 책상을 등지고 서면 방문이 보인다. 이 방문에는 성냥갑을 붙였다. 나무 문이라 테이프를 사용하면 자꾸 떨어져 아예 접착제를 이용해 붙였다.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고 절대 평범한 것은 취급을 안 했다. 특별한 것만 선별해서 색과 디자인을 조합했고 마치 세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특별히 구성했다.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를 이용해 조형미가 넘치게 붙였다. 가족들은 불난다고 불안해했지만 성냥이 없는데 어떻게 불이 나냐고 무식한 소리 말라고, 걱정도 팔자라고 맞받아쳤다. 내 방의 하이라이트는 벽지다. 난 지금도 이 벽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진짜 벽지가 아니고 벽지 위에 만든 나만의 세상 로드맵이라고나 할까. 당시 나는 논노 잡지 광팬이었다. 기다림이 설레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나는 논노 잡지를 통해서 배웠다. 내내 안절부절 기다리다가 받아 든 날은 너무너무 신이 났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그림들을 오려 벽에 붙인 뒤 색색가지 펜으로 어울리는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했다. 필요한 멘트나 사연, 정보들도 총 천연색 글씨로 써넣었다. 글씨체도 다 다르게 했다. 밤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처음엔 책상 위에만 하던 이 놀이는 점차 세를 확장해 급기야는 방 벽을 모조리 채웠다. 이 재미는 성냥갑 붙이기나 문구류 모으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패션 거리를 만들기도 하고, 도시를 세우기도 하고, 파티를 열기도 했다. 멋진 커플은 매번 탄생했는데 나중엔 그중에서 1등을 뽑는 놀이도 즐거웠다. 틈틈이 시간만 나면 벽에다 원하는 세상, 원하는 장면을 만들기에 심취했었던 그때 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었다. 제대로 미쳐있었다. 그리고 가장 순수했던 열정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림만 그렸다. 정말 바쁘게 전시도 하고 대회도 나가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언제부턴가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 에세이를 만났다. 비로소 내가 그렇게 행복했던 취미를 얼마나 오래 잊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행복했다. 재밌었다. 처음 느껴봤던 완벽한 몰입을 다시 한번 즐기고 있었다. 아직도 나에게 이런 열정이 남아 있었구나. 가슴 뛰는 재미가 느껴지다니. 다시 그때의 나를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틈틈이 그 재미를 즐겨 보려고 한다. 가끔 그때의 내가 튀어나오면 신나고 반갑고 행복하다.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는 취미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지만 열정이 나를 밀어줄 것이다. 어쩌면 어른의 재밌는 놀이는 원래 행복했던 ‘나’를 만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밌는 놀이를 잊어버려 어른들은 사는 게 더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그림도 글도 결국은 삶을 이야기하는 표현 방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인생은 없다. 하나하나 써내려 가다 보면 불행도, 행복도, 사랑도, 미움도 딸려 나왔다. 그 삶을 읽어내는 것이 어른들의 놀이다. 어른들의 놀이에는 상상이 아니라 자기만의 진짜 서사가 담긴다. 그래서 더 재밌다.
나는 닫힌 방문을 활짝 열었다.
열정 넘쳤던 그때 미친년처럼 다시 재미를 찾고 싶다. 재밌게 놀 줄 아는, 몰입의 재미를 아는 어른으로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 보려고 한다. 미쳐보자 다시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