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글로 상쇄시키기
누구나 비밀은 있단다.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란다. 각자 간직한 비밀을 비교할 수 없으니 누구 게 더 크고 누구 게 더 깊은지 알 방법이 없다. 개인마다 기준 설정값도 달라 삶의 수준 역시 비교 자체가 불가다. 수준을 평가할 수 없으니 난이도를 어찌 조정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특별한 사람도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이 비밀이란 것도 까고 보면 인간사 범주안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대단한 비밀을 안고 살아도 그래서 인생사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매일 같은 얼굴로 살아간다. 내면에서 계속 꿈틀대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로 인해 소진적인 삶에 짓눌려도 남들 눈엔 마냥 같은 얼굴이다. 이 얼굴이 완성된 모습인지 시작인지, 과정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사람들 인생은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을 요즘은 많이 한다.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림을 그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어릴 때 한 번쯤은 마음대로 낙서를 해 봤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숨기는 감정은 낙서처럼 그렇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의 낙서만 봐도 전문가들은 선의 힘이나 색, 형태를 보고 심리를 짐작하기도 한다.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마주하는 것은 하얀 종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종이를 보는 머릿속에는 이미 이미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우리 마음도 그렇다. 겉으로는 모두들 평온해 보이지만 누구나 내면에는 잠재적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아직 말로 꺼내지 않았고,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을 뿐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질문은 있지만, 정확한 답이 없다. 하얀 종이 앞에서 무엇을 그릴지 생각하면서 밑그림을 그리고 구조를 잡는 과정처럼 우리 인생도 그런 순서가 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림은 없다. 인지적 구조화의 과정을 통해 형태를 정리하고, 균형을 맞추고, 전체 구도를 계획하는 순서를 거치는 인간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즉시 표현하기보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고 정리한다. 말해도 될까, 내가 과민한 건 아닐까... 왜 나만 이럴까...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은 마음속에서 계속 도식화되고 분석된다. 겉으로는 침묵이지만, 내면에서는 치열한 스케치가 진행 중인 것이다.
그림이 항상 처음 의도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위에 덧칠하고, 심지어는 찢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정서 억제, 방어기제가 딱 이 단계였다. 서운해도 괜찮다 하고, 화를 숨기기 위해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모든 감정을 바쁨으로 덮어버리면 감정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덧칠된 것이다. 남아 있는 선은 가려지거나 뒤섞이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여러 번 겹쳐 칠해진 물감처럼, 원래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 층으로 남아 마음의 색을 조금씩 바꿔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색은 더 복잡해지고 정서의 복합성으로 한 가지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감정이 겹겹이 쌓여간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말하기에는 너무 무겁다. 복합적인 색이 되어버린 감정은 스스로도 다루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완전히 마르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을 때다. 미해결 정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번진다. 전혀 다른 상황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작은 말에도 과도하게 상처받는 것이 지금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덮어두었던 감정 때문일 수도 있다.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또 다른 붓질로 그림이 번지고 색이 섞이듯, 현재의 내 삶에도 그 흔적들은 자꾸 젖어들었다. 깊이 느끼고, 오래 생각하고,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감정들은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많은 그림이 전시되지 않은 채 내 작업실에 남아 있듯, 사람들 마음속에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장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비밀이 오히려 성숙함과 책임감의 다른 이름이 되어줄 수도 있다. 완성의 의미는 반드시 전시가 아니다. 스스로 이해하는 데 있다. 정서의 통합으로 스스로를 이해하자 내 그림도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모두 털어놓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는 숨기지 않는 것. 그것이 마음의 캔버스를 숨 쉬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없이 선을 긋고 지우고 덧칠한다. 어떤 감정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어떤 장면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그 사람의 깊이를 만든다. 쉽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거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그림을 세상에 내놓을 필요는 없다. 다만 가끔은 마음속 작업실의 문을 열어, 그 안에 어떤 색들이, 어떤 그림들이 쌓여 있는지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순간, 말하지 못했던 감정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한 편의 작품으로 완성될 확률이 높다. 완벽하지 않아도, 선이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로 힘들었던 내 인생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답답하지 않다. 그만큼 나는 지금 그림으로 글로 잘 상쇄시키고 있다는 뜻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