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짧은 북리뷰
도서관에 가니 어떤 책들은 ‘잠’이라고 붙인 스티커가 있다. 아무도 꺼내지 않는, 잠자고 있는 책이란 뜻이다. 부러 ‘잠’에서 몇 권 골라보았다. 비교적 글밥이 작은 책들 리뷰.
잡학다식한 오타쿠의 진수가 녹아있는 책. 만화를 몹시도 사랑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잡문이다. 잡문이라 했지만, 일본 애니 거의 알지 못하는 내게는 전문 서적과도 같았다. 개인적으로 읽고픈 만화책은 <오카자키에게 바친다>, <담요>, 신카이 마코토의 유명한 작품들 정도.
-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에 책장을 새로 정리한다. 덥고 습한 여름 동안 책장에 갇혀 눅눅해졌을 책들에게 환기의 기회를 주면서, 나 역시 한 계절 고인 생각을 환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65p)
- “대학 시절 소설 창작 수업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작가가 있다고 들었다. 하나는 남의 사연을 자기 이야기처럼 쓰는 작가, 다른 하나는 자기 사연을 남의 이야기처럼 쓰는 작가란다. 이 구분은 또 가지를 친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자기 이야기 그대로 쓰는 작가와, 남의 일을 남의 이야기로 쓰는 작가로.” (111p)
- “인간이 반드시 먼저 스스로 예민하게 인식해야 할 ‘부끄러움’의 가치. 요조의 고백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우주적 공포의 장인이 재해석한 인간 ‘실격’의 공포를 느껴봐야 할 이유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과연 ‘합격’일까? ‘수치스러운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 문장이 영원한 어둠 직전의 결론이 되지 않도록 살 수 있을까?”(121p)
릴케가 말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이 없을 것이다”의 서문이 강렬하고 찌릿하게 목 끝을 친다. 내 집은 없지만 먹고 마시고 피할 거주할 공간은 현재 있다. 하지만 집은 육체가 머무는 공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모험하는 낯선 공간일 수 있다고 했다. 이 책이 집 짓는 것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면 오해. 결국 정신으로. 조만간 구매해서 재독할 예정이다. 여름휴가 때 읽어보며 깊어질 수 있는 책. 개인적으로는 이종건 건축 박사이자 비평가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이 책에서의 ‘은총’과 집에 대한 탐구는 나의 호기심을 매우 자극했다.
- “인간은 의미의 존재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 지워졌다.”고 했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은 의미의 운명이 지워졌다.”고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의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무의미’한 삶마저 ‘의미없는 삶’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열정이나 기력을 잃는다. 없음이 ‘있음의 부재이듯 무의미는 의미의 결핍이다.”(30p)
- 은총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베유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은총이 들어설 ‘공허void’를 만들어야 한다. 공허를 받아들이고, 공허를 견뎌야 한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네 번 오른 프랑스의 철학자 티보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죽여야’야 한다. 마치 신이 모든 것이 되기를 멈춘 탓에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듯 신이 다시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이 되기를 멈춰야 한다. 우리 자신을 없애야 한다. 그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삶의 송곳니에 벌거벗은 채, 무방비로 노출한 채 삶의 모든 상처를 견딜 각오를 애햐 하며 공허, 곧 비대칭적 균형을 받아들여야 하며, 결코 보상을 구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은총이 흐르는 틈새를 끊임없이 막으려는’ 상상의 작용을 중단해야 한다. 모든 죄는 공허로부터 도망가려는 시도다.” (86p)
- 영혼의 집은 무엇으로 어떻게 짓는가? 집은 물질로 이뤄진 장소이자 공간이다. 그에 반해 인간은 ‘시간’으로 실존한다. 여기서 ‘시간’이란 현실 세계의 손익을 계산하는 객관적 시간이 아니라 의식 혹은 고독한 존재의 떨림에 따라 늘어지고 줄어드는, 때로는 멈추는 내면세계의 주관적 시간을 가리킨다. 실존의 경험은 곧 시간(성)의 경험이다. (122p)
- 인간이 지어낸 가장 탁월한 시간의 건축은 안식일이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면 무조건 개시된다. 세속사가 중단되고 초월적 시간이 펼쳐진다. 안식일은 그리하여 ‘영원’이 머무는 위대한 성당으로 변한다. 자연 또한 그렇다. 인간의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따르는 자연은 오직 자신의 리듬으로 흐른다. 꽃피는 봄,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단풍 드는 가을, 춥고 앙상한 겨울의 반복적인 , 그래서 어림 가능한 순환은 절대적이다. 종잡을 수 없는 기후와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은 절기와 더불어 존재의 생성을 드러내는 자연의 은총이다. (123p)
글쓰기에 관한 책들은 꽤 본 편이어서 웬만하면 책을 고르는 일이 없다. 다 비슷하고 뻔한 내용들일 거라는 생각에서이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고른 이 책은 그야말로 내게 망한 글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글쓰기 책은 내게 다시 새롭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격려와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이제 망한 글들 손 좀 볼까? 결국 글쓰기란 스티븐 킹이 말한 것처럼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작가 자신도 풍요롭고 살아내고 이겨내고 일어서서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멘이다.
-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솜씨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_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 예민한 성격인 데다 뭐든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방송 일을 했던 사람치곤 인간관계가 좁다.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혼자가 제일 편한 개인주의자인 셈이다. 하지만 글쟁이들 앞에선 예외다. 질투를 느낄 만큼 필력 있는 고수들에게는 먼저 연락하고, 밥과 술을 사 가면서 관계를 맺기 위해 애쓴다. 이 또한 그들의 노하우를 흡수하기 위한 나의 욕심 때문이지만. (129p)
- 동화를 쓰는 것도 개연성이 필수다. 자신이 창작한 작은 세계 안에 나름의 원칙을 만들어놓고, 그 원칙을 성실히 지켜 가야 어린이들도 그 세계를 납득할 수 있다.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세상, 동화책을 덮고 난 후에도 언젠가 가 보고 싶은 세상으로 그리기 위해선 다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풍부한 취재와 자료조사, 꼼꼼한 구성이 필요하다. (1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