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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고래 Nov 16. 2024

수고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밴라이프 #6

비가시적 은혜를 지각하는 우리의 상상력 in 밴쿠버



바이블 수업이 있는 기독 사립학교의 시스템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미션스쿨 시스템 안에서 큰 깨달음과 경험으로 변화되었다는 사람을 많이 접한 적도 없다. 종교의 이름으로 경직되거나 편협해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 싶었고, 각종 은혜로운 이름들 없이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었으며 지난 몇 년간은 일종의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어쩌다, 말도 안 되게 9월부터 나는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아이들은 기독 사립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자비와 정의가 성경 안에서 어떤 관계인가?"를 묻는 과제를 하는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 우려되었다. 오히려 기독교와 세상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로 진리를 알기도 전에 질려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예전 C교회에서 장로님 딸이었던 한 친구는 예배 끝나고 몰래 내 주보를 빌려 갔다. 아버지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배를 포함한 각종 종교적 행위가 지루하다는 명제로 일찍부터 마음의 문을 닫은 교회 아이 중 한 명이었다. 한편으로는 실컷 놀다가 뒤늦게 종교에 귀의한 내가 되려 다행이라는 우월한 생각도 했다. 물론 이 생각은 유효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 각자에게는 '때'가 있지 않은가.

비가시적 은혜를 가시적인 것들로 구현하고 상상해야 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기독학교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늘 의심이 된다. 하지만 이런 어른의 쓸데없는 고민과 상관없이 아이들의 세계는 창조주께서 무척 사랑하신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5일의 Holiday가 끝나기 무섭게 금요일도 Half-day로 점심시간 없이 일찍 마쳤다. 학교에서 아들들의 가장 친한 캐네디언 친구 L을 초대했다. 이미 초대받은 적도 있고, 평소에 좋은 친구로 있어 줘서 꼭 대접하고 싶어 마련한 자리였다. 그 친구는 부대찌개를 먹어보고 싶어 했다. 유튜브 보고 만들어주었다. 소식하는 그 친구는 두 그릇을 먹으며 맛있다고 연신 칭찬의 말을 내게 해주었다. 작은 일에도 감탄하고 감사하는 아이였다. 함께 윷놀이도 하고 영화도 보았다. ‘이제 집에 가려나?’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방에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영어로 서툴어도 애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남자아이들의 수다는 뜨개질 방 할머니들 못지않다. 다행히(?) 친구의 아빠가 도착함과 동시에 토크 종료. 미련 가득한 얼굴로 아빠 차에 오르며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라고 한국어로 인사한다. 아들들은 배웅을 마치고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동시에 말한다. (다자녀 아이들은 평소에 순서를 지키지만 가끔 오디오가 겹치도록 신나게 각자의 할 말만 한다.)


 “엄마! 엄마! L이 8월에 간절히 기도했대. 제발 학교에 한국인 남자 친구가 전학 오게 해주세요. 라고. 그런데 그다음에 우리가 왔던 거야. 진짜 너무 기뻤대!”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궁금한 것도 많았던 L은 아들들이 오고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해맑은 친구들의 이런 고백, 이런 태도. 묘하게 이질적이고 낯설고 뭉클했다. 물론 이 아이의 작은 기도가 우리의 때와 우연히 맞아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이 경험이 지루하고 형식적인 종교의 틀을 벗어나 실제 움직이고 역사하는 신의 섭리로 각인되어 학교와 일상을 더 즐겁게 누리는 풍요로운 힘이 되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예수의 떡과 잔을 나누듯 매일 같이 점심을 먹고 문화를 공유하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십 대 남자 아이들의 가시적인 시간 속에서 비가시적 사랑과 환대는 밴쿠버의 가을과 함께 짙고 근사해진다. 생각보다 과제도 많고 시험도 있지만 학교만 다녀오면 얼굴이 밝다. 각종 야채와 햄과 콩을 넣은 부대찌개처럼 어우러지는 두 나라의 아이들 웃음 속에 그분의 나라의 환영을 본다.


ᅠ“글을 맺으며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시적 세계 속에서 비가시적 은혜를 지각하는 성례적 상상력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야 세례와 성찬을 통해 부어지는 자비의 은혜가 ‘거룩한 예식’(성례)을 집행하는 교회를 감싸고 흘러넘쳐서 팍팍하고 무의미한 삶까지 촉촉이 채워 주며 일상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다.”(659p)

_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복있는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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