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라는 언덕]
마지막, 이 땅에 남은 할머니라는 존재가 오늘 사라졌다. 나의 네 분의 조부모님들과 남편의 조부모님들 넷을 우리는 이제 모두 떠나보냈다. 한국에서는 슬픔과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가족과 장례를 준비할 텐데, 나는 그렇지 못하니 조용히 그분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다.
외할머니는 1986년, 내가 여섯 살에 돌아가셔서 거의 기억에 없다. 하지만 시골에 놀러가면 엄청나게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난다. 아마 엄마가 참 예쁜 막내 딸이어서 우리까지 예뻐하셨는지 모르겠다. 쪽 찐 머리에 고운 한복으로 8남매를 낳아 기르신 외할머니. 키가 훤칠했던 외할아버지는 글씨를 잘 쓰고, 집도 손수 짓던 재주꾼 농사꾼이었다. 2007년 내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정신없을 때 돌아가셨다. 나의 유일한 생태적 감수성을 보유한 그 외가집 서까래와 기둥 보에는 할아버지의 친필이 담겨 있었다.
친할아버지는 노래하며 장구치는 주선(酒仙)이었다. 남존여비, 유교사상이 짙은 종가집에서 손녀인 내가 할아버지와 친해질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시던 장면과 돌아가시기 직전 중환자실에서 내 손을 꼭 잡던 그 힘과 두려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할머니는 가장 추억이 많은데, 다행히도 첫 책에 기록해 놓았다. 정말 잘한 일이었다. 나의 생일, 증손주 생일까지 기억하며 늘 전화와 편지와 용돈을 주시던 넉넉한 할머니. 태안 사람이라던 할머니 특유의 유머 감각은 짙은 농담은 아버지와 나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남편의 외조모님은 얼굴도 모르고 남은 기억도 없지만, 왠지 서글펐던 삶이 그려지는 분이다. 남편 외조부님의 얼굴도 모를 뻔했지만, 몇 년 전에 사진을 찾았고 학교 선생이셨다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남편 얼굴을 찾아 반가웠다. 남편의 조부님, 즉 나의 시할아버지는 조용하고 성실한 농사꾼이셨다. 아이들에게 신문 기사를 오려서 주고, 늘 가르치려고 애쓰시던 분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조모님, 즉 나의 시할머니는 오늘 101세의 나이로 한 세기를 보내고 생을 마감하셨다. 구라파 전쟁 같은 험난한 조선의 역사 속에서 코쟁이 미국인과 왜놈들을 피해 가난과 생존과 싸워가며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한 강인한 어머니다. 손주 며느리 집에 오신 날, 나에게 대파는 냉동실에 보관하고 김치찌개는 새우젓으로 간하라고 전해 주셨는데 전혀 잔소리로 느껴지지 않았다.
시할머니는 몸져눕기 전에 전국 팔도, 세계 곳곳 지팡이 하나 의지하여 신나게 다니셨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외국인 친구 삼고, 입원한 병실에선 인기 스타가 되고, 말못하는 언어장애인과도 절친으로 지내는 사랑받는 여자였다. 사랑을 퍼주는데, 굄을 배로 받는 사람.
평생 신앙이 없던 할머니는 세례 주시러 온 목사님이 잘생겼다며, 집에 와서도 한참을 얘기하며 웃음을 전하셨다지. 할머니는 시부모님의 기도와 고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그리고 작은 어머님과 아버님과 함께 오랫동안 거닐었던 용인집을 기억하며, 막내딸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숙제로 남기며, 큰아들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다시 육신의 몸을 벗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할머니의 존재가 이 땅에 없다는 의미는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비빌 언덕도, 괜히 안겨 어리광 피울 품도 없다는 서글픈 말이다. 괜찮은 어른인 척, 그 정도는 넉넉하게 참아줄 수 있는 어른인 척, 회사 일도 집안일도 잘하는 어른인 척 살다가도 할머니 언덕에 달려가면 “아이구, 잘 한다 내 새끼”라는 말을 듣고 고봉밥을 먹는 회복탄력성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헛헛한 사실.
집집마다 술 맛이 달랐던 시절. 할머니가 빚는 술이 그렇게 맛있었다는데, 곳간에 광주리 가득 만두를 빚어 놓으셨다는데. 오늘은 할머니를 위해 한 잔 올려 드려야겠다. 멀리서, 이제는 할머니 마지막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이씨 손주며느리, 쌍둥이 엄마가 인사 드립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고마웠습니다. Rest in Peace, Grand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