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 세계 여행 에세이 45 - 스위스 그린데 발트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가려면 인터라겐에서 산악열차를 타도 되지만 라우터브룬넨이나 그린데발트까지 차로 가서 그곳에서 산악열차를 타도 된다. 당연히 두 지점은 인터라겐보다 고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밤이 되면 더 추워지는 문제가 있지만 스위스 깊은 산에서 잘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나는 그린데발트로 정했다. 그 이유는 하나이다. 그린데발트가 라우터브룬넨 보다 덜 붐빌 것 같아서였다. 이 판단은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틀릴 수도 있다. 융프라우요흐 산악열차에 대한 가이드 북들은 대부분 라우터브룬넨에서 그린데발트로 오는 것을 먼저 추천하고 있다.
저녁이 다 되어서 도착한 그린데발트는 전형적인 스위스 산악 휴양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린데발트 역을 지나 마을 위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앞에 빈 공터가 있다. 주민들도 자유롭게 주차를 하는 곳이다. 가까운 곳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용 화장실도 있고 수도도 있다.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도 있고 역까지 걸어가기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사실 그린데발트 시내는 크지 않다. 밤이 되면 식당들은 영업을 하지만 대부분의 가계가 문을 닫기 때문에 거리는 조용해진다. 늦은 밤이 되면 교회 종소리도 잠을 잔다. 이곳에서 우리는 3박 4일 동안의 산속 생활의 자유를 즐겼다.
아침 일찍 융프라우요흐를 보기 위해 산악열차를 타러 그린데발트 역으로 향한다. 융프라우요흐 정상까지 가려면 먼저 클라이네 샤이덕(Kleine Schidegg) 역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융프라우요흐 정상까지는 이 곳에서 긴 바위터널을 통과해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아내는 정상까지 꼭 올라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융프라우요흐 정상을 잘 보려면 아래에서 봐야 잘 보이는 것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클라이네 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융프라우요흐를 즐기고 오잔다. 이 똥꼬 집을 꺾기도 힘들지만 사실 정상 날씨가 어떻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클라이네 역까지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다행히 클라이네 역의 날씨가 매우 좋다. 멀리서 보는 융프라우요흐 정상도 구름이 거의 없다. 일단 클라이네 역 주변을 산책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클라이네 역 주변에서 싸온 점심도 먹고 오후 4시 정도까지 있다 내려왔다. 아내를 설득해서 정상까지 가자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신비로운 느낌의 호수 때문이었다.
기대 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가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나 보다.
뜻밖에 만난 신비의 호수는 역에서 융프라우요흐 정상으로 가는 기찻길을 따라가는 방향에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 곳에 있다. 우리는 무심코 주변 산 풍경이 잘 보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산봉우리 쪽으로 향했다. 역에서 보는 것보다는 주변 풍경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아직 녹지 않는 눈들이 있었지만 걷기에 큰 무리가 없다. 십여분 걸어 올라가니 갑자기 동그란 모양의 호수가 나타난다.
오늘은 해가 비치고 바람도 없는 정말로 좋은 날씨다. 급경사 벽으로 유명한 아이거 벽이 잘난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추듯이 호수에 비추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호수 한쪽에는 예쁜 작은 집이 있다. 호수와 함께 하나의 그림 속 풍경화가 된다. 조용히 문을 열어 본다. 이 집은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는 아이거 벽 등정과 관련된 내용을 전시하고 있는 일종의 박물관이었다. 아마 위험 상황에서는 피난처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스위치를 누르면 아이거 벽 모형에 등반 코스가 표시된다. 모형이 꽤 디테일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코스 개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꼭 이렇게 위험한 곳을 올라가야만 해야 하는가라는 회의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사실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다만, 암벽 등반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소중한 곳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박물관을 나와 혹시나 산 위로 더 올라갈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진다. 산악열차가 박물관 옆으로 지나가고 있다. 곧바로 터널로 들어간 기차는 그 후로 보이지 않는다. 한참 후에 그 기차는 정상 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정상 역까지 가는 길은 모두 터널만이 있겠지! 아직도 산 정상 부근에는 구름이 걸려있다. 아마 오늘 같은 날이면 매우 추울 거야. 그리고 주변 풍경도 잘 안보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바위 속으로 기차 터널을 만들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그렇게까지 꼭 만들었어야 했을까?
무엇이 스위스 사람들로 하여금 그 험난한 터널을 뚫게 만들었을까?
마치 기독교인들이 하늘 높이 탑을 올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강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이념 같은 것이 있었을까?
기차가 들어간 터널 옆으로 사람들이 올라간 발자국이 보인다. 그 발자국을 따라 우리도 올라간다. 그런데 경사도 너무 심하고 그 발자국마저도 없어졌다. 온 김에 흰색 눈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내려가야겠다. 내려가려고 하는데 여자 두 분이 씩씩하게 올라오고 있다. 가만히 보니 한국분들이다.
우리 보고 걸어서 융프라우요흐까지 갈 수 있냐고 물어본다. 사실 나도 모르지만 산책하는 차림으로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배짱이 마음에 든다. 두 친구는 자유여행 중인데 그린데발트에 숙소를 정했고 비싼 물가 때문에 숙소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단다. 두 친구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호숫가에 마련되어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가져온 점심을 펴 놓고 허기진 배를 채운다. 산새들이 얻어먹을 게 있을까 하고 우리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한다.
"그래 너도 배고프지!"
빵을 조금 떼어내어 건네준다. 점심시간을 넘어서자 가끔 왔던 관광객들 모습도 사라졌다. 아직도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도 없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따뜻한 햇살 때문에 두껍게 입었던 옷을 벗고 벤치 위에 올라 누워본다. 그러다가 아내가 여기서 풍욕을 하고 싶단다. 고민할 시간도 없이 아내의 일탈이 시작되었다. 상의를 모두 벗어 버린다. 그리고 팔을 하늘로 쫙 벌려 융프라우요흐의 바람을 온몸에 담는다.
30년 부부생활 중 처음으로 아내가 벗은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내는 너무나 좋았는지 나의 옷을 강제로 벗긴다. 나도 상의를 벗고 스위스 산 바람을 맞이했다. 다행히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이 들지만, 몸이 생생 해지는 느낌이 든다. 아내는 아예 다른 테이블 위에서 요가까지 한다. 시원한 풍욕을 마치고 난 의자에 누워 파란 하늘을 쳐다본다.
우연히 만난 이 호수는 오후 내내 우리 부부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선물해주었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가 서쪽 산 봉우리에 닿으려 한다.
이제 정말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