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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Jul 31. 2022

고귀하고 창의적인 색,   보라색

 

세계적인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 2022년 트렌드를 리드할 컬러로, ‘베리 페리(Veri Peri)’라는 색을 선정하였다매년 12월 팬톤은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를 담아 ‘그 해의 컬러를 발표해왔는데, 2022년의 주인공으로는 연한 남보라 색인 ‘베리 페리를 선정하였다고 한다쌍떡잎식물 ‘페리윙클(periwinkle)’의 꽃잎 색인 남보라에 자줏빛 빨강이 가미된 색이다.


2022년의 색, ‘베리 페리(Veri Peri)’



 

보라색의 과학

우리말의 보라색’ 은 영어의 ‘violet’과 ‘purple’을 모두 포함한다때로는 ‘purple’을 자주색(紫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과학적으로 ‘violet’과 ‘purple’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색을 외관적으로 구별할 때, purple은 붉은 기운이 더 돌고 채도가 높은 편이며, violet은 푸른 기가 돌며 채도가 낮은 편이다. 이 글에서는 두 색을 구별하기 위해 violet은 보라색으로 purple은 자주색으로 부르기로 한다.



Violet과 purple



빛의 과학 측면에서 말할 때 보라색은 가시광선 스팩트럼에서 파장이 가장 짧은 빛으로 파장은 380 나노미터에서 435 나노미터까지다. 즉 보라색(violet)은 스팩트럼 색상으로 무지개에서 볼 수 있는 색인 반면, 자주색(purple)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혼합하여 만드는 색으로 보라색처럼 고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파장이 긴 노랑에서 녹색 사이의 빛에 민감한 L 원추세포, 중간 파장인 청록과 파랑에 민감한 M 원추세포, 그리고 파랑과 보라색 사이의 빛에 민감한 S 원추세포 등 원뿔 모양의 3가지 종류의 색 감각 세포인 원추세포가 있다. 하나의 원추세포는 특정 파장대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지만 다른 파장의 빛에도 반응하며 반응 곡선이 서로 일부 겹쳐져 있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볼 때 그 물체로부터 반사된 빛은 원추세포에 의해 감지되고, 원추세포로부터 감지된 신호는 뇌에 전달되어 세 가지 다른 원추세포로부터 온 신호를 조합하여 색을 인지하게 된다. 우리가 순수한 녹색 빛을 볼 때, "녹색"에 해당하는 M 원추세포와 "빨간색"에 해당하는 L 원추세포가 모두 활성화되지만, 뇌에서는 M 원추세포의 신호가 크고, L 원추세포의 신호가 작을 때에 순수한 녹색이라고 인지하게 된다.



빛에 대한 시세포의 반응 곡선



그렇다면 보라색 빛이 망막에 닿으면 어떻게 될까? 빨간색에 민감한 L 원추세포는 흥미롭게도 파란색의 짧은 파장 영역에도 작은 민감 영역을 가지고 있다. 보라색 빛이 망막에 닿으면, 파란색 영역을 감지하는 S 원추세포와 함께 빨간색 영역을 감지하는 L 원추세포도 일부 활성화된다. 이 두 신호가 뇌에 동시에 전달되게 되는데, 뇌는 이런 종류의 입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보라색(violet)으로 인식한다. 실제로 녹색 영역을 감지하는 M 원추세포도 보라색 파장에 약하게 반응하지만 뇌는 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주색은 보라색보다 더 "빨간색"으로 보이는데, 자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1:1에 가까운 비율로 섞여서 형성되는 반면, 보라색은 빨간색보다 파란색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어 푸른 느낌으로 인식된다. 자주색과 보라색이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는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의 원추세포를 자극하기 때문이지만,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은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원추세포와 '후처리 과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에게 자주색과 보라색은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만일 자주색 무늬가 있는 보라색 꽃잎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구분되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많은 동물들은 녹색 배경에서 주황색 무늬를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 카메라도 우리의 눈과 같이 적색-녹색-청색 정보를 포착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꽃잎의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편집한다고 해도 그 패턴이 밝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라색의 역사

영어의 violet color는 보라색의 제비꽃(violet flower)에서 유래했다. 한편 우리말의 보라색의 어원은 몽골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에 몽골의 풍습 중 길들인 매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던 풍습이 전해졌는데, 사냥을 하던 매 중 그중 그해에 나서 1 년이 안된 어린 매를 보라매라 한다. 보라매의 앞가슴에는 담홍색의 세로무늬의 털이 있었는데 보라매를 몽골어로 ‘보로(boro)’라고 불렀으며, 이 말이 보라색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어의 purple은 그리스어 포르푸라(πορφύρα, porphura)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이는 고대에 사용하던 자주색 염료인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을 부르던 이름이다. 고대 페니키아 인들은 여러 곳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고 지중해 전역에서 교역을 하였는데오늘날 레바논의 도시인 티레(Tyre, 성경에서 두로로 알려진 곳)는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곳이었다이곳에서는 볼리누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뿔고둥 소라 혹은 고둥 달팽이)라고 불리는 바다 달팽이로부터 만든 자주색 염료인 티리언 퍼플을 이용하여 천에 물감을 들였다하지만 원료를 구하기 어려워 고가의 염료로 금값만큼 비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이나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물감이었다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4세기), 이 염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으로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했다고 한다.

 


자주색 염료인 ‘티리언 퍼플’의 원료인 바다 달팽이



선사 시대의 동굴에서도 보라색으로 칠해진 벽화가 발견되었는데그들은 망간과 철광석 광물을 사용하였다폴리네시아의 서쪽에서는 주민들이 성게로부터 티리안 퍼플과 비슷한 보라색 염료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중앙아메리카에서는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 해변에 사는 푸르푸라(purpura)라는 조개로부터 보라색 염료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그밖에도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 지방에서는 보라색 이끼에 암모니아(보통 소변)를 섞어 보라색 물감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세 시대의 화가들은 빨강과 파랑의 색소를 섞어서 자주색이나 보라색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파란색 물감으로는 아주라이트(Azurite)라 불리는 남동석(藍銅石)이나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라 불리는 청금석(靑金石)을 사용하였으며, 붉은색 물감은 붉은 황토인 오커(ochre), 수은 화합물인 진사(辰砂, cinnabar 시너바)나 납의 광석인 연단(鉛丹, minium)을 사용하였다. 


18세기부터 유럽에서는 합성염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염료로는 쿠드베어(Cudbear)와 프렌치 퍼플(French purple) 등이 있다. 두 염료 모두 이끼류를 암모니아로 처리하여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에는 코발트 바이올렛이 만들어졌으며 망간 바이올렛과 함께 오늘날 화가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바이올렛 색소이다.
 

보라색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화가는 모네다. 그는 수련, 건초더미 시리즈, 루앙 대성당 시리즈 등에서 보라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밖에도 샤갈, 로스코, 마티스 등도 보라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반 고흐가 1889년에 그린 붓꽃 그림에도 청자색(靑紫色) 붓꽃이 가득 그려져 있다. 



모네의 수련



자연에서 만나는 보라색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라색은 무지개와 제비꽃 그리고 보라매의 가슴 털 등에서 볼 수 있는 색이다. 자연에는 보라색 꽃들이 많고 보라색으로 익는 과일이나 열매도 있다. 대표적인 보라색 꽃으로는 제비꽃, 라일락, 라벤더, 도라지꽃, 개미취 등이 있으며, 보라색 열매로는 포도, 가지, 자두, 좀작살나무 열매 등이 있다. 오렌지색 당근도 원래는 흰색이거나 보라색이었다고 한다. 원래의 보라색 당근을 단맛이 더 나도록 네덜란드의 원예학자들이 오렌지색 당근으로 만들었다. 이런 보라색을 지닌 꽃이나 열매에는 안토시아닌이라는 천연 색소가 들어있어 고유의 보라색을 가지게 된다. 안토시아닌은 플라보노이드계 물질로, 식물의 여러 부위에서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 열매에서는 동물을 유인하는 색을 만들어 그 동물을 이용해 자신의 씨앗을 퍼트리게 해 준다. 꽃에서는 색을 만들어 곤충을 유인함으로써 꽃가루를 옮기게 만든다. 잎에서는 강한 자외선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식물세포 속에 생기는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항산화제로도 작용한다. 안토시아닌은 산성도에 따라 붉은색에서 보라색, 파란색, 녹색 및 노란색으로 변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색소다. 


꽃가루를 나르는 벌들은 빨간색을 보지 못하지만 자외선을 내는 푸른 계열이나 보라색은 볼 수 있다영국 퀸 메리 대학(Queen Mary U.)의 연구팀은 독일 뷔르츠부르크(Wuerzburg)의 호박벌이 보라색 꽃을 좋아하는 현상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실험실에서 연구자들은 그 고장에서 발견되는 꽃들의 꿀 양과 갓 태어난 어린 호박벌의 일종인 뒤영벌(Bombus terrestris bumblebees)의 꽃 색깔 선호도에 관한 조사를 했다그 결과 벌들이 선호하는 보라색 꽃이 그 지역의 다른 꽃들에 비해 꿀의 양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물론 모든 지역에서 벌들이 보라색 꽃을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다연구자들은 이 지역 벌들이 보라색 꽃이 좋은 꿀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보라색 꽃을 좋아하는 개체들이 우세종이 되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제비꽃, violet


보라색의 심리학


보라색의 대표적인 느낌으로는 고귀함과 화려함, 영감과 상상력, 개성, 영성 그리고 여성성 등이 있다. 오래전부터 보라색은 왕족과 부의 상징이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황제들만 보라색 토가(고대 로마의 남성 정장)를 입을 수 있었으며, 일반 사람들은 보라색을 사용하지 못하게 엄격히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영국 왕실까지 이어져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티켓들 중 일부를 보라색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콘셉트의 유명한 회사 로고 중에는 홀마크가 있다. 예쁜 카드로 잘 알려진 홀마크의 로고는 보라색 글씨 위에 보라색 왕관이 씌워져 있어 고귀함과 화려함 및 여성성 등을 함축하고 있다. 보라색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과 상상력의 이미지를 로고로 사용하는 회사 중에는 색체 전문 연구소인 팬톤(Panton)과 미국의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는 기업 야후(Yahoo) 등이 있다. 


모든 색이 그렇듯 보라색에도 긍정적인 특징과 부정적인 특징이 있다. 긍정적인 특징으로는 명랑하고, 변덕스러우며 장난기가 있는 색으로 현실로부터의 탈출과 마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자주색은 용맹과 관련이 있어, 임무 수행 중에 부상을 입은 미군 병사들에게는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한다고 한다. 보라색의 부정적 특징으로는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또 고귀한 색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오만함과 거만함 같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퍼플 하트 훈장



보라색에는 다양한 색조가 있으며 각 색조마다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다. 라벤더(lavender)는 연보라색으로 청록색을 띠며 취약성, 민감성 등의 느낌을 준다. 라일락(lilac)은 약간 분홍빛이 도는 연보라색이다. 미숙함, 피상적 그리고 젊음을 상징한다. 모브(mauve)는 창백한 자주색으로, 아욱 꽃 (프랑스어: mauve)의 이름에서 온 색이다. 이 색은 라벤더와 라일락 사이에 있는 색으로 정의와 옳은 일을 상징하며 우리가 최고의 선택을 하도록 돕는다고 알려져 있다. 자수정(amethyst)은 신비로운 색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도주의적인 느낌을 지니고 있다. 자두(plum)는 불그스름한 보라색으로 고전적인 색이며 명예롭고 가족적인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어두운 자주색은 더 높은 영적 성취와 관련되어 있지만, 오만과 무자비함의 느낌도 가지고 있다. 


팬톤이 올해의 색으로 발표한 베리 페리는 평온한 블루에 레드의 활기가 더해져 푸른 계열의 모든 색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따뜻한 색이라고 한다온화한 색감의 옅은 남보라색으로 탄생된 베리 페리는 푸른 기운이 주는 평온함과 붉은 기운이 뿜는 변화무쌍함을 모두 내포하고 있어 코로나-19 팬데믹이 종식될 것으로 기대되는 2022년의 색으로 가장 어울리는 색일 것으로 예상하였다그 희망이 현실이 되어 보라색의 감성에 젖을 수 있는 2022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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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사보 <KRISS> 2022 여름호에 실린 제 과학 칼럼입니다.

* 사진 출처: KRISS 2022년 여름호 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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