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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Jan 08. 2023

모든 것을 가지고도 여백으로 남는 색-흰색


 비 온 뒤 하늘에 신비롭게 펼쳐지는 무지개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색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에 내리는 눈의 흰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흰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흰색은 색일까 아닐까?

 

우리가 흔히 대하는 두 가지 색흰색과 검은색은 색일까 아닐까만일 과학자에게 이 질문을 하면 과학에만 근거한 답으로 둘 다 색이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하지만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쩌면 조금 다른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 “검정은 색이지만흰색은 색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색을 가시광선의 파장에 대응하는 스펙트럼 색상의 관점에서 보면 흰색은 모든 색상이 합쳐진 색이기 때문에 대응하는 파장이 존재하지 않고검은색은 빛의 반사가 없기 때문에 두 색 모두 색으로 정의되지 않는다하지만 시각 예술의 세계에서 흰색과 검은색은 엄연히 물감이 존재하는 색이기도 하다


우리가 색을 인지하는 것은 어떤 물체로부터 우리가 보는 색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이 반사되거나그 물체가 그 파장의 빛을 방출하기 때문이다빨간 꽃은 태양빛이 꽃에 닿았을 때 빨간색을 제외한 다른 빛을 흡수하고 빨간빛만을 반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꽃을 빨간색으로 인지하게 된다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한 뒤 반사된 빛이 없을 때 우리는 검은색으로 인지하며 모든 파장의 빛을 다 반사할 경우 우리는 흰색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TV나 모니터 같은 가색법(additive color) 시스템에서는 빨강(R), 녹색(G), 파란색(B) 빛을 같은 비율로 혼합하면 흰색의 빛을 만들 수 있다반면 물감과 같은 감색법(subtractive color) 시스템의 경우 어떤 색을 섞어도 흰색을 만들 수 없다인쇄의 경우 사이언(C), 마젠타(M), 노랑(Y), 그리고 키 혹은 검은색(K)을 사용하며 흰색은 어떤 색도 칠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입장에서 흰 도화지는 색이 아니고 그저 배경이나 공백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하지만 흰색의 물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은 혼동이 될 것이다.



흰색의 어원

 

우리말 흰색의 어원으로 를 말한다학자들에 따르면 해의 중세어는 ‘ㅎ+아래아+ㅣ모음’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명사로는 ‘해’, 동사로는 ‘희’에 ‘다’가 붙어 ‘희다’로 변했다고 한다. 해가 백색광의 원천이니 물리학적으로도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흰색은 한자로는 흰 백()을 사용하는데 상형문자이다 보니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촛불의 심지가 타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밝다'는 의미로부터 '희다'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우리가 한낮을 백주(白晝)라 부르는 것을 보면 밝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영어의 white 역시 어원은 ‘밝다’ 혹은 ‘빛’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눈은 왜 흰색일까


눈은 구름 안에 있던 물 입잖아 대기 중 수증기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면 얼어서 결정화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녹으면 빗물처럼 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비나 물은 투명한 무색인데 눈은 하얗게 보인다. 왜 그럴까? 


눈은 작은 얼음 결정체들의 집합이다. 이 작은 결정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면 얼음처럼 맑고 거의 투명한 모양이지만 눈송이가 만들어질 때 수백 개의 작은 얼음 결정체들이 모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솜털 같은 눈송이 사이사이에는 작은 공기주머니가 가득 들어있는 샘이 된다. 더욱이 나무나 바닥에 쌓인 눈 층은 대부분 공기의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이 하늘로부터 내릴 때 빛이 눈의 얼음 결정 표면에서 반사되는데결정의 다양한 면이 있어 반사되는 빛의 파장이 가시광선의 모든 파장을 포함하게 되기 때문에 눈에서 반사된 빛을 우리는 백색광과 같이 느끼게 된다더욱이 바닥에 쌓인 눈은 어마어마한 양의 눈 결정들이 겹쳐져 있다이 얼음 결정들은 창유리처럼 투명하지도 않고 방향이 제각각으로 놓여 있게 된다. 빛이 쌓인 눈의  얼음 결정에 도달하면 굴절하여 방향을 바꾸거나 내부 표면에서 다양한 각도로 반사된다. 빛이 결정체 안에서 앞뒤로 반사되는 과정에서, 어떤 빛은 반사되어 밖으로 나오고 어떤 빛은 흡수되기도 한다. 이렇게 수백만 개의 얼음 결정체로 이루어진 눈의 층에서 반사되어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빛은 가시광선의 모든 파장이 고르게 섞이게 되어 우리는 눈을 흰색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

흰색의 역사

 

인류는 선사 시대부터 흰색 물감을 사용하였다유명한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 중에는 흰색으로 선명하게 칠해진 말이 등장한다이 동굴 벽화는 약 17,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3,000년 지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만들어졌는데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흰색을 높이 평가했다그래서 그들은 인구가 약 50,000명이나 되는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루크에 지상에서 12 m 높이의 아름다운 흰색 구조물인 하늘의 신 아누(Anu) 신전을 만들었다또한 제사장의 집을 흰 석고를 이용하여 하얗게 칠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흰색은 중요한 색이었다그들은 흰색을 순수함전지전능함신성함과 연관시켰다이집트 성직자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적 의식에 흰색 도구를 사용했다우리는 기자(Giza)에 있는 대피라미드를 잘 알고 있다지금은 주변의 모래와 비슷한 색을 지니고 있지만 이 피라미드가 세워진 B.C. 2,600 년 경에는 약 550만 톤의 흰 석회암으로 덮여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침식되고 사람들에 의해 석회암이 벗겨지게 되었다건설 초기에는 146.6 m로 그 후 무려 3,800년 동안이나 인류가 만든 가장 높은 건축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흰 석회암층이 사라진 현재에는 138.5 m로 낮아지게 되었다그 당시 뜨거운 이집트의 태양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는 매끄러운 석회암 피라미드는 아마도 경외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기자(Giza)에 있는 대피라미드,  일부는 초기 모양의 상상도



고대 로마의 도시들을 상상해 보기로 하자우리가 보는 지금의 이탈리아를 통해 우리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얀 기둥들과 하얀 조각상들로 가득 찬 도시들을 상상할 것이다하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그 대리석의 많은 부분이 페인트나 장식으로 가려져 있었다고 한다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대리석에 칠해졌던 페인트와 장식들이 사라져 가고 지금의 멋진 흰 대리석이 드러나게 되었다물론 고대 로마에서도 흰색 토가는 가장 널리 입던 그들의 옷이었으며 신분이 높을수록 더 밝은 흰색의 토가를 입었다고 한다또한 조각상들은 칠을 했지만 대리석 건물의 외관은 흰색으로 두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서양문화에서 흰색은 신성하고 순결한 색으로 인식되어 종교적인 의식에 많이 사용된다이는 성경에서 천사나 신성한 예수님의 모습그리고 순결을 뜻하는 어린양 등이 흰색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교황도 흰 옷을 입으며결혼식에서 신부들의 웨딩드레스도 흰색이다동양의 경우 흰색은 수묵화에서 비어 있는 공간 혹은 여백 그리고 죽음과 연관되는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상복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서양의 영향으로 동양에서도 신부의 결혼식 웨딩드레스는 대부분 흰색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백의민족이라는 호칭이 있을 만큼 흰 옷을 즐겨 입었다여기에는 조금씩 다른 견해나 유래에 대한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민족이 유난히 흰 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민족에 비해 흰색 옷을 선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삼국시대에는 지배층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여 화려한 색의 옷을 즐겨 입었지만일반 백성들은 대체로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그 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흰 옷을 많이 입었다명나라 사신의 기록이나 서양 사람들의 기록에 조선 사람들은 모두 흰옷을 입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백의를 금지하는 칙령이 여러 번 내려진 적이 있었는데 일반 백성들의 흰옷을 입는 관습은 바꿀 수 없었다. 백색은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불멸의 색으로 인식하여 하늘과 땅을 숭배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과 일맥상통한다는 견해도 있다. 우리가 매일 먹는 흰쌀밥이나 잔치 때 먹는 흰 술에, 흰 떡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흰색 물감

 석회 가루와 젯소(Gesso, 동물 아교와 흰 분필 가루를 섞은 것)는 선사 시대에 얻을 수 있는 최초의 흰색 안료였다그 후 그리스 시대에는 백연(白鉛)이라고 불리는 lead white가 흰색 안료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백연은 탄산납이 주성분으로 서양 미술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흰색 안료가 되었다. 이 안료는 화장품에도 사용되었지만 납 성분으로 인해 납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이 있어 현재는 많은 나라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1834년에 징크 화이트(zinc white, 산화아연)와 1921년에 티타늄 화이트(titanium white, 이산화 타이타늄)가 등장함으로써 미술과 산업에서 백연을 대체하였다. 가장 늦게 만들어진 티타늄 화이트는 이제까지의 모든 흰색 물감에 비해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가장 빛나는 흰색으로 뒷배경을 감추는 능력이 뛰어나며 백연보다 불투명도가 2배가 될 뿐만 아니라 화학적 안정성도 우수하다


흰색을 즐겨 사용하였던 미술가로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을 들을 수 있다그의 1923년 작품 구성 A’는 순수한 빨강노랑검정파랑과 함께 흰색을 사용하였다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작품은 더 단순해지고 흰색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 1930년의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II’에서는 흰색의 영역이 더 확대되었다. 그 후 1935년의 작품 ‘Composition with Blue’에서는 대부분의 화면이 흰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몬드리안의 작품 ‘Composition with Blue', 1935 

출처: https://www.art-prints-on-demand.com/a/piet-mondrian/kompositionmitblau.html



흰색의 심리학

 

흰색의 긍정적인 키워드는, 순수, 청결, 평등, 완전과 전체, 단순, 깔끔, 새로운 시작 등이 있다. 반면에 불임, 엄격, 까다로움, 귀찮음, 공허함, 고립. 신중, 단순, 지루함 같은 부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길 것이 없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균형 잡힌 안정된 성격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청결을 좋아하고 위생적인 편인데, 다른 사람들이 청결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으면 신경이 쓰일 수 있는 경향이 있다.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 될 수도 있다. 


흰색은 스타트업이나 기술 회사와 같은 현대적이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업의 브랜드에 아주 좋은 색깔이다. 반면에 큰 개성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나 에너지가 넘치고 밝은 브랜드를 목표로 하는 경우라면 흰색을 피하는 것이 좋다. 앞서 언급한 대로 흰색은 공허함 또는 불임 같은 부정적인 느낌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흰색을 전략적 브랜드로 사용하는 기업으로는 ‘애플(Apple)’, ‘소니’, ‘Adidas’, ‘기아자동차’ 등을 들을 수 있다.  




한겨울의 색을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흰색이라 말할 것이다. 삭막하고 무채색으로 둘러싸인 주변을 밤사이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만들어 주는 매직이 가능한 흰눈이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가장 낭만적인 겨울 소망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빛의 모든 파장을 다 가지고도 여백처럼 남아있는 흰색의 매력에 빠지는 겨울이 되기를 바란다. 




* 이 글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사보 <KRISS> 2022 겨울호에 실린 제 과학 칼럼입니다.

* 사진 출처: KRISS 2022년 겨울호 사보, 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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