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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Nov 23. 2020

Poetic autumn-18

사철나무 열매

Poetic autumn-18, 사철나무 열매


늘 푸른 잎을 가진
사철나무


얼마 전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타려다

외손녀가 불러 가보니

울타리 옆 작은 화단의 사철나무에 열린

노란 씨방 속 붉은 열매 두 알이

대나무 잎 사이로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푸른 잎을 가진 사철나무


그 나무도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를 맺어

가을이 되면

이리도 붉은 열매를 보여준다.


잎은 늘 푸르지만

그 안에는 삶의 연륜과 궤적이

이렇게 쌓여간다.


가을 나무가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모습으로 돌아갈 때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해 보이는

사철나무의 비밀이 알고 싶어진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poetic_autumn #사철나무_열매 #우리동네 #2020년 #사진 #감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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