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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Apr 27. 2021

The Number - 100

완벽함을 지향하는 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책가방 속에서 오늘 본 시험지를 꺼내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부모 앞에 내놓는다. 시험지의 점수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모든 부모가 칭찬해 준다면 이 아이의 점수는 틀림없이 100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 점수를 만점(滿點)이라고도 부른다. 가득 찬 물 항아리에 더 이상 물을 부을 수 없는 상태와 같은 가득 찬 점수라는 의미다. 100이라는 숫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숫자이다.



가득 찬 의미로 사용되는 100

100 점과 마찬가지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마 백분율(%) 일 것이다. 어떤 수를 100과의 비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100 %는 가장 완벽한 상태가 된다. 백분율의 개념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경매에서 판매되는 물건들에 판매가의 1/100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관행으로부터 퍼센트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백분율의 영어인 퍼센트(percent)는 라틴어의 per centum(by 100)으로부터 나왔다. 또한 백분율의 기호 %는 이탈리어 말 per cento(for 100)로부터 진화되었다. ‘per’는 자주 ‘p’로 줄여서 사용되다 완전히 사라졌다. 17세기쯤에는 ‘cento’가 평행한 선분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원()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현재와 같이 두 개의 원이 사선에 의해 나누어진 형태(%)는 1925년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단군 신화 중 유명한 곰과 호랑이의 설화가 있다. 신화에 의하면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인간의 3백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에 살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환웅에게 빌었다. 이에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잘 아는 대로 잘 참은 곰은 21일 만에 여자 사람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굴을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도 100은 아마 가득 찬 날 수를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실히 원하는 일이 있을 때 100일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100일 기도는 말 그대로 100일을 꼭 채워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처럼 100이라는 숫자는 '완벽함, 가득함, 그리고 온전함'을 뜻한다.

 

100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식물 이름들도 있다. 순결과 신성함의 상징인 향기 좋은 백합이 있다. 흰색의 꽃이 대표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백합이 한자로 희다는 의미를 지닌 백합(白合)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100이라는 의미의 백합(百合)이라고 쓴다. 이는 땅 속 뿌리가 많은 쪽으로 이루어진 구근으로 되어 있어 100 개의 쪽이 모여 있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100일 동안이나 오래 피는 꽃이라고 해서 백일홍(百日紅), 향기가 멀리 100리나 간다고 해서 붙여진 백리향(百里香), 거친 땅에서도 오래 산다는 데서 비롯된 백년초(百年草) 등도 있다.




한계처럼 느껴지는 100

우리는 현재 21세기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하여 100년이 되는 2100년까지를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100년을 단위로 역사의 시간을 나누기도 한다. 세기는 영어로 센추리(century)인데, 이 말은 라틴어의 100을 나타내는 센툼(centum)에서 왔다. 약자로 나타낼 때에는 c 로 나타내는데, 100의 로마자가 바로 c이다. 사람들의 수명이 점차 길어져 이제 소위 말하는 100세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즉 한 세기를 살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00 은 상당히 긴 시간이며 현재까지는 인간 수명의 마지노선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에서 속도의 상한선은 대체적으로 시속 100 km다. 요즈음은 제한 속도가 110 km/h인 도로도 많아졌지만, 시속 100 km는 오랫동안 제한 속도로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의 속도계를 보면 시속 200 km를 훌쩍 넘는 눈금이 있는데 왜 제한 속도는 100 km/h에 머물러 있을까? 이는 도로를 설계할 때 여러 조건에서 평균적인 운전 실력을 갖춘 운전자가 안전하게 주행할 수 있는 최고 속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나 눈이 오는 날 커브 길에서 어느 속도까지는 원심력에 의해 차가 밖으로 밀려나가지 않도록 경사를 두어 설계하는데, 이때 속도가 커지면 이 설계치에서 벗어나게 되어 위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설계 속도는 평지에서는 120 km/h, 구릉지에서는 110 km/h, 산간 지역에서는 100 km/h로 책정된다. 도로의 제한 속도는 이 설계 속도보다 10 km/h에서 20 km/h 낮게 설정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는 100 km/h에서 110 km/h가 된다.


제한 속도가 100 km/h인 도로에서 앞차와의 안전거리는 100 m를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 정도의 안전거리가 필요할까? 안전거리는 차를 정지해야 한다고 느끼고 실제로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 달리는 거리(공주 거리)와 브레이크를 밟은 후 차가 정지할 때까지의 거리인 제동거리를 합한 거리를 의미한다. 공주 거리는 사람들의 반응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데, 반응 시간은 일반적으로 0.5초에서 1초 정도라 한다. 만일 반응 시간을 1초라고 하면 시속 100 km로 달리던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고 느끼고 실제로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의 1초 동안 자동차는 시속 100 km로 계속 달리기 때문에 28 m를 진행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속도가 줄어드는 감속도를 대략 -5 m/s라고 하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이동하게 되는 제동거리는 78 m가 된다. 이를 합한 안전거리는 106 m가 된다. 공주 거리는 자동차의 속력에 비례하지만, 제동거리는 달리던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차의 속도가 2배 빨라지면 제동거리는 4배나 길어지게 된다.




물이 끓는 온도, 100 °C

왜 물은 꼭 100 °C에서 끓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온도란 어떠한 사물의 뜨겁거나 차가운 정도를 말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뜨겁고 차가운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과 기준을 알고 싶어 했다. 1596년 갈릴레오는 온도 차이만을 알 수 있는 온도측정기(thermoscope)를 발명하였다. 하지만 온도 눈금도 없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그 후 많은 과학자들이 더 발전된 장치들을 고안해 내었으나, 1724년 과학자이며 과학 실험기구 제작자인 파렌하이트(Gabriel Fahrenheit, 1686-1736)가 유리 관 속에 수은을 넣고 밀봉한 온도계를 발명한 후 온도 눈금을 만들기까지는 진정한 온도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온도계의 눈금을 만들기 위해 기준이 되는 고정점이 필요했다. 그는 염화 암모니움, 얼음, 및 물을 섞어 그 당시 그의 실험실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낮은 온도를 0도(°F)라 하였으며, 물과 얼음이 공존하는 온도를 32 °F로, 또 건강한 사람의 체온을 96 °F라고 하여 그 구간을 균등하게 나눈 온도 눈금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후 물이 어는 온도를 32 °F로, 끓는 온도를 212 °F로 하는 두 개의 고정점을 이용하여 그 사이를 180 등분한 온도 눈금이 되었다. 이것이 화씨온도 눈금이다. 지금도 화씨온도를 사용하는 미국에서는 아이들의 체온이 100 °F(37.8 °C) 이상이면 열이 있다고 생각하여 해열제를 먹이거나 병원에 데려간다.


하지만 180으로 등분한 온도 눈금은 사용하기에 불편하였다. 그래서 1742년 스웨덴의 과학자인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1744)는 물의 어는점과 끓는점을 두 개의 고정점으로 하여 그 사이를 100 등분한 새로운 온도 눈금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과는 반대로 물의 끓는점을 0 °C로, 어는점을 100 °C로 제안하였다. 그 후 1743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장 피에르 크리스틴(Jean-Pierre Christin, 1683-1755)이 섭씨온도의 눈금을 물이 어는 온도를 0 °C로, 끓는 온도를 100 °C로 바꿀 것을 제안하여 현재의 섭씨온도 눈금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물이 끓는 온도가 100 °C가 된 것이다. 즉 물이 끓는점이 100 °C인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 분자는 열에너지를 받게 되면 분자 운동이 활발해져 온도가 올라가게 된다. 충분한 열에너지를 가지게 되면 물 분자끼리의 결합을 끊고 물 표면으로부터 밖으로 튀어 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증발이라고 한다. 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증발되는 수증기의 양이 증가하여 물표면 부근에 있는 증기의 압력(증기압)도 올라가게 되는데, 물의 온도가 100 °C가 되면 물의 증기압과 물을 누르고 있는 대기압이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물 분자들이 대기압을 이기고 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되며 이때를 물이 끓는다고 한다. 일단 물이 끓는 온도에 도달하면 외부에서 공급되는 열에너지는 물 분자가 수증기로 되는 에너지로 쓰이기 때문에 물의 온도는 올라가지 않고 100 °C에 머물러 있게 된다.




물이 끓는 온도는 항상 100 °C?

만일 외부의 압력이 1 기압보다 높게 되면 100 °C가 되어도 물 분자들이 외부의 압력을 이기고 탈출하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더 많은 열에너지를 공급해야 탈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끓는 온도가 높아지게 된다. 반대로 외부 압력이 낮으면 100 °C가 안 되어도 물 분자들이 용이하게 탈출할 수 있게 되어 끓는 온도는 내려가게 된다. 높은 산에 올라가 밥을 하게 되면 대기압이 낮기 때문에 낮은 온도에서도 물이 끓어 밥이 설익게 된다. 한라산 정상에서는 대기압이 대략 0.8 기압이므로 93 °C 정도에서 물이 끓게 되고,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는 대기압이 0.3 기압으로 낮아져 70 °C 정도에서도 물이 끓게 된다. 반대로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게 되면 100 °C보다 높은 온도에서 물이 끓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도 쌀이나 잡곡이 잘 익게 된다. 실제로 압력밥솥에서는 1.5 기압에서 2 기압 정도의 압력을 유지하게 되며 이때 물이 끓는 온도는 112 °C에서 120 °C가 된다.


물의 끓는 온도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요소는 소금과 같은 물에 녹는 물질의 첨가이다. 소금은 물에 녹게 되면 Na(나트륨)과 Cl(염소) 이온으로 갈라져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물질이 함께 존재하면 물의 표면에서의 물의 농도가 순수한 물에 비해 약간 낮아져 물의 증발이 순수한 물에 비해 적어지며 증기압도 낮아진다. 그러므로 100 °C가 되어도 용액의 증기압이 1 기압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며 용액의 온도가 더 증가해야만 끓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화씨온도를 사용하는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섭씨온도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물질의 특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열역학 온도 체계를 사용한다. 즉 1848년 켈빈 경(L. Kelvin, 1824-1907)이 제안한 절대온도를 사용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모든 분자 운동이 멈추어 가장 낮은 온도 상태를 0 K으로 하고, 물이 고체, 액체 및 기체의 3 가지 상태가 공존하는 점인 삼중점 온도를 273.16 K으로 정의하여 그 간격을 섭씨온도의 1 도와 같도록 등분한다. 절대 온도로는 물이 어는 온도가 273.15 K, 그리고 물이 끓는 온도는 373.15 K이 된다. 이 정의는 2019년 5월 물리 상수인 볼츠만 상수를 기준으로 바뀌게 되었다. 비록 물이 끓는 온도 100 °C는 섭씨온도계에서만 적용되며 그것도 제한된 조건에서만 적용되지만,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신화처럼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한다. 만일 그 목표에 도달했다면 100 % 달성이라는 만족감으로 더 이상 그 목표에 붙잡히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된다. 하지만 만일 98 %만 도달했다면 나머지 2%로 인해 늘 아쉬움이 남게 된다. 때문에 100 %와 98 %는 2 %의 차이이지만 만족도에 있어서는 상당히 큰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처럼 100이라는 숫자는 때로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이 글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사보 <2020 KRISS 사보 제2권>에 게재된 제 글입니다.

*이미지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페이스북에 실린 카드뉴스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www.facebook.com/134052253314795/posts/326960887309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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