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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Oct 15. 2020

라디오

2000년 2월 나에게는 생각하지 못했던 '위암'이라는 어려움이 찾아왔다. 다행히 나는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갑자기 찾아온 뜻밖의 질병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였다.
그 후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와 사진 찍기는
오늘까지 이어져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 중 중요한 하나가 되고 있다.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글들을 하나씩 꺼내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
<마음 공감>에 담아두기로 했다.



   수술을 받은 지도 이제 6개월이 되었다. 항암치료도 끝난 지 한 달이 되어 이제 약간의 마음의 여유도 찾아가고 있고 몸 상태도 많이 회복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침 시간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몸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에는 아침을 먹고 조금 쉰 뒤에 아침잠을 자기도 한다. 이 아침잠 역시 연구소에 출근할 때에는 꿈도 못 꾸어보던 즐거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최근에 찾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아침을 먹고 성경을 조금 읽은 뒤 라디오를 듣는 일이다. 그동안 이렇게 여유 있는 아침 시간도 없긴 하였지만, 있다고 하여도 라디오를 들을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었다. 항암치료를 받던 기간 중에도 자지 않는 아침시간이 있었지만 TV를 보면서 멍하게 지내곤 하였다.


   내가 라디오를 열심히 듣던 시절은 고등학교 때 심야 음악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나는 직접 신청곡을 신청해 본 적은 없지만, 좋아하던 곡을 신청하고 방송이 되기를 열심히 기다리던 친구들이 있었던 생각이 난다. 같은 반 친구의 누나인 임국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프로에 신청곡을 보내고 그 친구를 통해 방송이 될 수 있도록 부탁을 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밤늦게 나지막이  들려오는 좋아하던 음악과 정성을 기울여 써 내려간 아름다운 사연들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여러모로 인생살이가 바빠지고 TV가 보편화되어 라디오와는 점차 거리가 멀어져 갔다.


   얼마 전 나는 전에 사 두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워크맨을 꺼내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디오의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다 클래식이 나오는 방송에 고정하고 듣기 시작하였다.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보면서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파란 하늘과 생명력이 절정에 이른 짙푸른 소나무들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그동안 느껴보기 힘들었던 평안함이 마음속에 퍼져옴을 느꼈다.


그동안 멀리 하였던 라디오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물론 음악은 CD나 카세트로 들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곡들이란 제한된 레퍼토리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일일이 신경을 써서 곡을 선택하여야 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즐길 수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라디오는 내가 그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다양하게 곡을 바꿔가면서 그 날의 분위기까지 감안하여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에 우선 좋은 것 같다. 또한 TV와 달리 라디오는 들으면서 얼마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독서를 즐길 수도 있고, 창 밖의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산책까지도 가능하니 말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면서 그 속으로 녹아드는 첼로의 깊은 음색이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게 하고, 맑은 날이면 파란 하늘 저 높이 나는 새들처럼 가벼운 바이올린의 선율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을 설레게 한다. 때로는 흘러간 팝송을 들으면서 지나간 추억들을 되새김하듯 흥얼거리기도 한다. 이렇듯 아침나절의 라디오는 나에게 새로운 즐거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나는 정신없이 무엇을 위해서 인지도 모르면서 달려가고만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음악이 때로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잔잔한 평안에 머물게 한다는 것과, 작은 라디오가 이러한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오늘도 창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기도 하고, 친구가 보내준 어느 교수의 수필집을 읽거나,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어보기 위해 읽기 시작한 스티븐 코비의 가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아침나절을 보내고 있다. 어려움의 시간 속에서도 나에게 이렇게 쉬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러한 작은 즐거움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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