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바닥에 버려진 바나나 껍질을 밟아본 적이 있는가?
직접 경험을 할 기회는 많지 않겠지만,
밟아 본 사람이라면 마치 스키장에서 스키를 타듯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나나 껍질은 미끄러울까? 2012년 일본의 학자들은 그 이유를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자면 바나나 껍질은 바닥과의 마찰계수가 아주 낮아 마치 눈 위에서 스키를 탈 때의 미끄럼 정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연구에 의하면 리놀륨 바닥에 바나나 껍질의 안쪽면이 닿도록 놓았을 때 마찰계수는 평균 0.066으로 리놀륨 바닥의 마찰계수 0.412 보다 6/1로 작아졌으며, 눈 위에서 스키를 탈 때의 마찰계수인 0.04에 가까운 정도였다. 이렇게 마찰계수가 낮아지는 이유는 과육을 감싸고 있는 껍질 안쪽면이 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작은 돌기나 난포로 구성되어 있고, 압력이 가해지면 탄수화물과 단백질로 구성된 다당류의 젤이 흘러나와 바나나와 바닥 사이의 마찰계수를 낮춰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나나 나무?
TV에서 세계여행 프로그램이나 오지 탐험 프로그램을 볼 때, 열대 지방의 숲 속에 높다랗게 달려있는 커다란 바나나 송이를 보면서 저 멋진 나무를 하나쯤 가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식물학적으로 바나나는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이 아니라 초본의 열매다. 즉 딸기처럼 매년 새 순에서 올라온 줄기에 달리는 베리(berry)로 분류된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허브에 달리는 가장 큰 베리라 할 수 있다. 바나나는 3.5 m까지 키가 자라지만, 나무 같은 몸통이 없으며, 잎들이 겹쳐진 줄기에 의해 지탱되며 큰 잎이 위쪽에서는 펼쳐진다. 바나나 식물은 순에서부터 9개월이면 다 자라 꽃을 피운다. 바나나가 열리고 나면 지상에 있는 부분은 죽고 뿌리 순이 밑부분에서부터 자라기 시작해 다시 커지고 꽃을 피운 후 열매를 맺는 순환을 한다.
바나나의 종류는 1000 가지가 넘지만, 우리가 간식으로 먹는 대부분의 바나나는 씨가 없는 캐번디시 바나나(Cavendish banana)다. 씨가 없기 때문에 이 바나나는 뿌리 순을 때어내 이식시켜 번식하게 된다. 대형 제배 농장에서는 조직 배양을 통해 싹을 만들어 번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바나나는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쌍둥이들이라 할 수 있으며 병충해가 발생하면 그 품종 전체가 멸종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전에는 더 당도가 높았던 그로 미셸(Gros Michel)이라는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는데, 1950년대 파나마병으로 멸종해 버렸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유래한 캐번디시 종이 대체 품종으로 선택되었다. 그런데 캐번디시 역시 현재 TR4라는 곰팡이 균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과일로 년간 1억 1천4백만 톤이 생산된다. 생산된 과일의 85%는 현지에서 소비되는데 국민 1인당 소비가 가장 많은 나라는 르완다로 1인당 하루에 5개의 바나나를 먹는다고 한다. 바나나 수입이 가장 많은 미국의 경우 년간 1인당 12 kg의 바나나를 먹는데, 개당 120 g으로 계산해보면 100개 정도가 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에서는 바나나가 간식이나 후식용 과일에 해당하지만, 수백만의 저개발 혹은 개발 도상국 사람들에게는 주식에 해당되는 식품이다. 물론 우리가 먹는 캐번디쉬 종과는 다른 바나나를 요리로 해서 먹는 경우가 많다.
‘바나나(banana)’라는 말은 손가락이라는 아라비아 말 ‘바난 (banan)’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바나나는 인류가 가장 오래전부터 재배한 식량의 하나일 것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10,000년 전부터 야생 무사(Musa) 종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수 천년에 걸친 자연선택에 의해 더 당도가 높고 맛있는 종자들이 만들어졌으며 캐번디시와 같은 씨 없는 잡종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1-2 세기에 아랍 상인들이 동남아에서 바나나 뿌리 순을 아프리카 동쪽 해안지역에 전했다. 그리고 바나나는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나갔다. 16세기에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서쪽 해안으로부터 바나나를 라틴 아메리카에 전했다.
바나나가 익는 과정
바나나는 열매다. 자연에서 열매의 본연의 임무는 씨를 번식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열매는 익어가면서 당도가 높아지고 색이 고와져 동물들을 유혹하고 동물들이 과육을 먹고 난 후 땅에 버려진 씨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이어간다. 동물을 유혹하지 않더라도 열매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씨를 땅에 떨어뜨리게 된다. 녹색의 딱딱한 바나나는 노랗게 변해가면서 당도가 높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조금 더 익게 되면 표면에 갈색의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 익지 않은 바나나에는 엽록소가 많이 있어 가시광선 중 초록빛에 해당하는 빛을 반사시켜 우리 눈에 초록색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바나나가 익어가면서 껍질에 있던 엽록소는 분해되고 카로티노이드 같은 색소만 남게 되어 초록 계열의 빛을 흡수하고 노란 계열의 빛을 반사하게 되어 우리 눈에 노란색으로 보이게 된다. 아주 잘 익은 부분은 당도가 올라가면서 거의 모든 빛을 흡수하여 어둡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노랗게 익은 바나나의 당도는 16 Brix(브릭스) 정도이며 표면에 갈색 점이 막 나타나기 시작할 때에는 당도가 21.3 Brix까지 올라가며 더 지나면 오히려 당도가 떨어진다.
익은 바나나가 소비자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는 바나나 숙성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전문가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들은 환기와 습도 및 온도가 정밀하게 조절되는 첨단의 숙성실을 가지고 있으며, 바나나가 익을 때 나오는 에틸렌 가스의 조절도 엄격하게 이루어진다. 먼저 초록색의 수확된 바나나는 상대습도가 70 % 에서 90 %, 온도는 15.5 °C 에서 21 °C로 유지되며 지속적으로 환기가 이루어지는 방에서 보관된다. 숙성은 에틸렌 가스를 외부에서 방안으로 주입되어 밤새 순환시키면서 시작된다. 그 후 방의 온도를 15.5 °C에서 16.7 °C로 유지하고 에틸렌 가스는 방에서 모두 뽑아낸 뒤 신선한 공기로 환기를 한다. 아직 이 단계에서 바나나의 색은 녹색이지만 숙성이 시작된 단계이다. 전문가들은 바나나의 색을 면밀히 검사하면서 전체적으로 노란 느낌이 살짝 나기를 기다린다. 그림 1의 컬러 차트에서 보통 3단계 부근에서 소매상에 배송이 시작되는데 유통되는 과정에서 바나나는 계속 숙성된다. 큰 마트나 도매상의 경우 3단계에서 5단계를 유지하며, 소비자들은 기호에 따라 4단계에서부터 7단계까지를 구매하게 된다.
바나나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맛과 향은 바나나 속에 들어있는 이소아밀 아세테이트(Isoamyl Acetate)라는 유기 화합물 때문이다. 이 물질은 다른 과일에도 일부 들어 있으며, 이상하게도 벌침에 쏘였을 때에도 적은 양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바나나에는 특별히 많은 양의 이소아밀 아세테이트가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음식과 함께 보관하면 음식에서 온통 바나나 냄새가 나게 된다.
바나나의 보관
바나나는 아직 안 익었을 때에는 당도가 높지 않고 딱딱하여 맛이 없지만 숙성이 진행되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완숙 단계를 지나 너무 물러 먹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일반 과일처럼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어려워 보관하는 방법이 까다로운 편이다.
바나나를 사 오면 바로 비닐 포장을 벗겨내는 것이 좋다. 아직 녹색 빛이 남아있는 단계라면 상온에 보관하면서 더 숙성이 진행되도록 한다. 숙성을 촉진하려면 갈색 종이봉투에 넣어 입구를 봉해 둔다. 만일 좀 덜 익어서 빨리 숙성시키고 싶다면 봉투 속에 사과나 토마토를 함께 넣어두면 좋다. 사과나 토마토에서 나오는 숙성 가스인 에틸렌 가스가 바나나의 숙성을 촉진해 주기 때문이다. 실온이 높을수록 숙성 속도도 빨라진다. 조금 오래 보관하려면 바나나를 걸을 수 있는 바나나걸이에 걸어두는 것이 좋다.
노랗게 다 익은 바나나가 많이 남아 있을 경우 바나나를 하나씩 송이로부터 떼어서 따로 보관하면 각자로부터 나오는 에틸렌 가스의 영향을 줄여 좀 더 오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덜 익은 배나 아보카도를 바나나 옆에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덜 익은 과일은 보다 빨리 익게 되고 바나나가 더 익는 것은 늦출 수 있는 윈-윈 전략이 된다. 매달려 있던 줄기 부분을 랩으로 꼭 싸주면 에틸렌 가스의 방출을 줄여 숙성을 늦출 수 있다.
완전히 다 익은 바나나는 냉장고의 야채칸에 보관할 수도 있다. 냉장 보관 시 숙성 속도를 현저히 낮출 수 있어 잘 익은 바나나를 보관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껍질은 검게 변하게 되지만 내부는 신선함을 1~2 주일 정도까지 유지할 수 있다. 만일 다른 과일과 함께 보관하거나 자주 야채칸을 열어야 할 경우에는 줄기 부분을 랩으로 잘 싸 두면 좋다.
바나나의 영양과 건강상 좋은 점
바나나에는 칼륨과 식이섬유 형태인 펙틴이 많이 들어있고, 마그네슘과 비타민 C 및 B6도 많다. 비타민 B6를 많이 가지고 있어 붓기를 줄여주고, 제2형 당뇨병 예방에 좋으며, 체중 감량, 신경계의 강화 및 백혈구 생산을 도와준다. 대체적으로 모든 영양 성분은 바나나가 익어가면서 증가한다. 표면에 갈색 반점이 나타나는 단계의 완숙 바나나는 녹색 바나나에 비해 백혈구를 만드는 능력을 8배나 더 증가시킨다.
중간 크기의 바나나 하나 (126 g정도)의 열량은 110 Cal다. 혈당지수(GI 지수)는 51로 중간에서 낮은 정도다. 수분이 75 %를 차지하며, 탄수화물이 30 g, 당분이 19 g, 식이 섬유가 3 g, 단백질이 1 g 정도 포함되어 있다. 무기물 중 칼륨은 450 mg으로 성인 1일 권장량의 13 %이며, 비타민 B6는 성인 1일 권장량의 33 % 나 된다.
연구에 의하면, 칼륨을 매일 1.3 g – 1.4 g 섭취하면 심장병 위험을 26 % 낮추는데 기여한다고 한다. 여기에 바나나가 가지고 있는 항산화 효과의 플라보노이드 역시 심장병 위험을 낮추는데 기여한다.
바나나에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합성에 필수적인 트립토판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다. 특히 바나나에 들어있는 트립토판은 잠을 유도하는 특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바나나에 들어 있는 비타민 B6도 잠을 잘 자게 하는데 도움이 되며, 마그네슘은 근육의 이완에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바나나는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운동 후 에너지와 전해질 보충에 바나나가 스포츠 음료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한다. 2012년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장거리 사이클 경주에 참가한 남자 선수들에게 15분 간격으로 각각 스포츠 음료를 주거나 바나나와 물을 먹도록 했다. 선수들의 경기 시간과 신체 생리학은 두 경우 모두 같았다. 하지만 바나나의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선수들의 항산화 능력을 향상시켰고 산화 스트레스를 도와 바나나와 물을 먹은 선수들의 경기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바나나가 건강에 해가 된다는 보고는 없다. 다만 너무 많이 먹을 경우에만 문제가 될 수 있다. 미국 농무부에서는 성인의 경우 하루에 2-3 개의 바나나를 권하고 있다. 만일 매일 10여 개의 바나나를 먹게 되면 비타민과 미네랄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당도가 높기 때문에 과도하게 먹을 경우 비만이 될 수도 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육 속에 비타민과 칼륨, 마그네슘 등의 무기물이 듬뿍 들어 있는 잘 익은 바나나 하나는 훌륭한 간식으로 우리에게 힘을 줄 뿐만 아니라 기분도 좋게 만들어준다. 이제부터 바나나를 먹으면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나나의 과학도 음미해 보길 바란다.
*이 글은 계량측정협회 소식지 2021년 봄호에 게재된 제 과학칼럼입니다.
*이미지 출처: Pix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