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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Apr 17. 2020

라면 이야기

레코드 가게 라면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음악을 틀어 놓는다. 이른 아침에 듣는 음악은 긴 어둠을 뚫고 맞이하는 새벽에 마시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의 맛처럼 따뜻하고 맑은 기분을 불어넣는다.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에 접어 드니 짧지만 감미롭고 달콤한 아침 시간이 좋았다. 

아침 시간이 길 면 하루가 길다. 공부도 못하는 녀석이 그래도 책이랍시고 펼쳐 영어 단어 몇 개 외우고 국어 책 한 번 더 읽는다. 그 시절 질풍노도와 같았던 때에 중학교를 입학했다고 아버지가 쓰시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햇살 따스한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 했다. 

아침은 신선하다. 싱그러운 과일에 이슬이 맺히고 그 과일의 풋풋한 향이 스며 나오는 시간이다. 이제 막 해가 뜰까 말까 하는 하늘은 코발트 빛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알 수 없는 하루에 대한 기대가 마음을 흥분시킨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해서 전날 읽다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주인공은 로데를 향한 사랑의 편지를 써 내려가는 장면을 읽고 또 읽는다. 마치 주인공과 내가 겹쳐져 사랑의 설렘으로 가득하다.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에 취하고 풋사과 같은 사랑에 취해 이른 아침을 맞이 한다. 책상 앞에는 언제 문을 열고 방을 들여다볼지 모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교과서와 참고서를, 마치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줄 요량으로 펼쳐져 있다. 

그 위에 살짝 소설을 올려놓고 읽는다.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음악이 끝난다 싶은 순간 펜을 들고 공책에 라디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 속에 흘러나오는 제목을 얼른 따라 적어 놓는다. 

비발디 헨텔 무소르그스키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할 것 없이 많은 서양 작곡가가 만든 곡을 다시 한번 더 듣기 위해 작은 메모장에 정성껏 적는다. 

역시나 방문이 열리고 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대견해하신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책은 잽싸게 책꽂이로 숨어 버리고 나는 연필을 쥐고 열심히 영어 단어를 외고 있다. 

이제 슬슬 책상을 정리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부엌에 있는 라디오가 켜지고 어머니는 밥을 지으신다. 라디오에서는 이제 음악 대신 뉴스와 성우들의 말소리가 들려 나온다. 

군사 독재 시절에 걸맞은 내용의 방송이 흘러나온다.

 뭔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시민으로 살아가는 예절이나 훈훈한 일상의 이야기를 라디오 드라마로 짤막하게 방송하는 프로가 많았다. 

그 방송 소리를 들으며 등교 준비를 한다. 학교 생활은 교복만큼이나 딱딱한 곳이었다. 지금의 군대보다 더 획일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검은색 교복 안 주머니에 나는 아침에 제목을 적어 둔 작은 수첩을 넣는다. 

등교 뒤에 시간은 더디게 간다. 물론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특히 수학이니 물리나 화학 과목은 왜 그리 싫었는지 모른다. 특히 수학 시간에 선생님은 얼굴은 한국 사람이지만 말은 외국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거기다가 선생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짧은 지휘봉이 공포를 만든다. 그는 지휘봉을 흔들흔들하면서 칠판을 가리키기도 하고 한 번씩 교탁을 내리 치기도 하고 교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간다. 혹시라도 칠판에 문제를 적고 풀어 보라고 하면서 꼭 앞으로 호명하며 칠판 앞에서 풀게 하시던 선생님의 눈길과 마주 치치 않으려고 이리저리 눈빛을 피해 공책과 연필을 들어 문제를 푸는 시늉을 했다. 이제 담임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고 자유를 만끽하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교 교문을 나선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어깨에는 비어 달그락 소리를 내는 까만 보온도시락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향한다. 물론 집으로 바로 가진 않는다. 친구들 집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빈 공터에 가방과 교복 윗도리 벗어 놓고 공을 차기도 하고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방과 후를 보낸다. 친구들과 헤어진 나는 집 근처의 레코드 가게로 향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레코드 가게로 걸음을 재촉한다. 강마르고 키가 큰 레코드 가게의 아저씨는 마음이 좋다. 작은 가게에 북적거리는 아이들을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는다. 여학생 남학생 섞여 레코드를 고른다. 용돈을 꼬깃꼬깃 모아 레코드 한 장에 다 털어 버린다. 

나는 아저씨에게 수첩에 적힌 제목을 내민다. 계산대 뒤 편에 있는 두꺼운 책을 가지고 오신다. 카세트테이프 진열대 뒤편 구석에 작은 의자에 앉아 음악 백과사전을 펼쳐 보며 열심히 작곡가들에 대해 공부를 한다. 

참나!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 공부는 이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읽고 적는 동안 벌써 해는 뉘엿뉘엿 넘어간다. 검은 물결로 가득 차 있던 레코드 가게도 썰렁하리 만치 조용하다. 

앗! 코에서 구수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라면 국물 냄새가 잊고 있던 시장끼를 깨운다.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려 하지만 어느새 진열장 앞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구경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웃음을 참고 있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반쯤 열린 쪽문에는 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이고 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그때까지도 착한 아들인 나는 어머니에게 혼날까 봐 마음 쫄이던 순진 무구한 어린 중학생이었다. 

아저씨가 매장으로 냄비를 들고 나온다. 막 집으로 가려고 가방을 들고 모자를 쓰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라면 몇 젓가락 뜨고 가라 말씀하신다. 못 이기는 척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작은 테이블에 바짝 당겨 와 앉는다.

우~와! 냄새만으로도 발길이 저절로 멈춘다. 거기에 시큼한 김치까지 함께 따라 나오는다. 매장에서 나처럼 끝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여학생 셋도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물론 아저씨의 강력한 권유에 마지못해 먹는다는 생색을 내는 모습이 아주 희극이다. 마음속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니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저씨는 바깥에 흘러 나가는 음악을 바꾼다. 저녁 시간에 알맞은 폴모리 악단의 레코드 판을 건다. 

감미로운 경음악과 김치 냄새와 함께 풍기는 묘한 라면 냄새!

다섯이 둘러 앉아 라면을 먹는다. 작은 종지에 라면을 들어 먹는다. 여학생들 셋이 나 하나를 압도한다. 

머리도 들지 않고 라면만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입 안으로 들어간다. 

라면! 그 기름진 맛과 튀긴 면발의 고소함이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맛있다. 


레코드 가게 아저씨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늘 가게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말이 밥이지 휴일에 가게에 놀러 가 보면 빈 짜장면 그릇 잡채밥 그릇 같은 중국집 음식 그릇이 구석에 아무렇게나 쳐 박혀 있다. 

홀아비 냄새가 난다. 

얼핏 보기에는 마른 얼굴에 차갑게 느껴지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강렬하지만 늘 차가움 속에 따뜻함이 뿜어 나온다. 아는 것도 많고 읽은 책도 많은지 늘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사람이었다. 

역사와 음악에 본래 관심이 많았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할 때면 마음속에 감탄이 절로 생겼다. 


오늘 아저씨는 이른 저녁을 먹는다. 이제 겨우 5시가 넘어가는 시간인데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밤이 되면 배고플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끔 보이는 소주병이 몇 개가 나뒹굴고 있으면 전날 밤 배고픔을 달래며 그 쓴 술을 마셨음이 분명하다.

워낙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니 가끔 라면도 얻어먹는다. 여학생들은 못생긴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신들의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래도 못 생기고 키가 작지만 남학생이라 의식은 하는 모양이다.  

그 셋 중에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성당 어린이 미사 때 매 주일 마주치던 아이가 있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얼굴도 희고 가름한 편이라 얼핏 보면 참 예쁘게 생겼다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볼 정도의 아이다. 

키다리 아저씨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책을 읽고 사랑에 설렘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에만 가지고 있는 나만의 감정이었다. 성당에는 나보다 키 크고 활달한 남자아이들이 그 아이 앞에 자신을 한껏 뽐내고 있지만 나는  조용히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그런 소심한 아이 었으니 그저 바라보는 예쁜 소녀로만 남아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레코드나 혹은 카세트를 사려고 가면 그 아이와 종종 마주 치곤 했었다. 

나야 여기서 아저씨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오랫동안 머무르다 라면까지 함께 먹는다. 마주 앉아 라면을 먹는데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그 아이에게 들리까 마음 조여진다. 먹을 때마다 자꾸 날 쳐다본다. 에고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 숙이고 라면만 후루룩 후루룩 거린다. 

아저씨는 우리와 음악이야기 역사 이야기 책 이야기를 하고 가끔 대학 시절의 이야기도 듣는다. 

우리는 웃고 장단 맞추다 보면 라면 냄비는 어느새 비워진다. 

아저씨는 다 먹었으니 얼른 집에 가라고 하신다. 잠깐 한두 시간 나에게는 아주 행복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고 아이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나온다. 아이는 나를 보고 살짝 웃어 준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 걸릴 뻔한다. 

 나의 행복한 공간을 떠나 오는 게 아쉽지만 집 근처에 있어 언제든 놀러 올 수 있는 가게였다. 

나의 사춘기 시절 그 레코드 가게에 가면 아저씨의 무뚝뚝한 얼굴에 숨어 있는 다정함과 음악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아저씨가 들려주는 역사이야기가 재미있어 학과 공부 대신 책을 몰래 보았다. 

대학을 진학하고 그때까지도 문을 열고 있던 레코드 가게는 군대를 간 사이에 청과물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나의 아지트였던 그 레코드 가게 아저씨의 이름도 모른다. 

그 멀쑥한 키에 안경을 낀 긴 머리의 아저씨가 이제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음악의 세계와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많은 지식을 알 수 있는 열쇠를 쥐어 주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비록 가난한 나의 삶이지만 그래도 마음의 풍요로움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주는 작은 거름이 되어준 레코드 가게다.

 아저씨와 그 작은 레코드 가게, 그리고 그 안 쪽방에서 끓고 있는 라면 냄새가 내 마음 가득히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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