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 생명의 시작
시작과 끝은 바늘과 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끝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시작이 이어지고 시작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가 된다.
어느새 시작인가 싶으면 끝에 도달하여 달리기를 멈춘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사람의 삶 또한 시작과 끝의 반복 속에 살아간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시작과 끝을 반복한다. 그 순환 속에서 때로는 성공을 거머쥐고 때로는 실패의 쓴 잔을 마시기도 한다.
실패의 순간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시작하는 여정이 반복된다.
계절의 변화도 시작과 끝의 연속이다.
겨울은 모든 생명이 잠시 멈추는 순간이다. 초록으로 물들었던 대지는 누런 황금색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고,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의 잎들은 하나하나 떨어져 바람결에 여기저기 흩어진다.
왕성했던 생명의 자취를 숨긴 대지는 마치 죽은 듯 긴 잠에 빠져 든다.
음력 정월 보름이 지나고 나면 자연은 긴 잠에서 깨어난다. 을씨년스럽고 적막한 모습은 잠시 떠났던 생명의 신이 바람과 함께 찾아와 깊은 잠에 빠졌던 대지를 깨운다.
일 년의 시작은 봄이요 하루의 시작은 새벽이다. 그 시작을 알리는 봄이 대지를 깨우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싹이 점점 움터 자라난다.
초보 농부도 어둡고 긴 겨울을 지나 봄의 정기를 받고 기지개를 켠다. 모진 세월의 삭풍을 이겨 내고 동녘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온기에 감싸여 봄을 맞이 한다.
한 마지기 남짓한 작은 밭을 바라본다. 녹은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파릇파릇한 어린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태동한다.
얼어 붙은 땅 속에 생명은 피어나지 않을 듯 했지만 샛바람을 맞은 따에는 새 생명이 피어난다.
지나간 고통의 시절을 모두 떠나보내고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첫 봄을 맞이했다.
회색의 도시에서 느낄 수 없던 초록의 모습을 바라본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희망이 다시 용솟음쳐 오른다.
귓가에 올리는 굉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이웃집 아저씨의 트랙터가 힘차게 밭으로 전진한다.
초보 농부의 힘든 수작업이 보기 딱해서 밭을 갈아 주시기로 했다.
이제 지난해에 무성히 자란 잡초 더미 같은 밭에 트랙터가 밀고 가며 생명을 불어넣는다.
어느새 트랙터 몇 번 움직이고 밭은 작물을 받아들일 모습을 갖추어 간다.
밭 한편에 준비 해 둔 고추와 호박, 참깨 모종들이 어서 자기를 땅에 심어 달라고 야단이다.
밭고랑 사이로 아주머니가 괭이를 어깨에 메고 곱게 갈린 흙으로 새롭게 단장을 한 밭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걸음걸이 모습에서 농부의 자신감이 한껏 뿜어져 나온다.
갈 곳 없어 방황하던 나에게 다른 문을 열게 해 주신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어설프게 내딛기 시작한 농부의 삶을 다정한 이웃들이 함께 걸어 가 준다.
너무 곱게 갈려 손을 대기 아까울 밭에 두둑을 만들기 위해 괭이가 사정없이 파고든다.
멍하니 서서 아주머니의 손 빠른 동작을 넋을 잃고 바라고 고 있자니 아주머니의 핀잔소리가 들어온다. 어서 옆에 서서 따라 해 보란다. 골을 파고 두둑을 만들어야 모종을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힘을 주어 괭이 손잡이를 붙잡고 아주머니를 따라 골을 파고 두둑을 만든다. 난생처음 해보는 괭이질에 손은 아프고 속도는 느리다. 트랙터를 멀찍이 새워 두고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는 아저씨가 어설픈 괭이질 하는 나의 모습에 웃음을 참기 힘든 모양이다.
아직 봄날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 오지만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제 만들어진 두둑에 비닐을 씌워야 한다. 여름 내 심은 작물이 잡초에 기운을 빼앗기지 말라로 비닐을 두둑에 씌우는 작업이다. 비닐을 잡고 있는 아주머니가 깔고 밭고랑 끝에서 끝으로 종횡무진 달리신다. 그 뒤를 따라가는 나의 숨소리는 턱까지 차오르고 파랗던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다. 괭이질 속도에 나는 그만 기가 질려 버린다. 범접하게 힘든 내공이 숨어 있다.
두둑 가장자리에 다시 흙을 덮어 비닐이 잘 덮어야 한다. 그래야 비바람을 이겨 나간다.
혼자서 하려면 하루 해가 빠듯할 일을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일을 끝낸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가 잘 걸을 수 있게 도와주는 보행기 같은 두 분의 손길이 초보 농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농사를 만만하게 생각하다면 오산이다. 엄청 어렵고 힘든 일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고 반 백 년 손에 흙먼지 하나 묻혀 본 일 없는 초보 농부는 이렇게 또 하나의 몫을 하는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삶의 막다른 길에 더 이상 출구가 없다고 생각할 때쯤 농부가 되어본다.
계절의 시작인 봄에 나는 또 다른 시작점에 서 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붉게 물들어 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내일을 생각한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나에게 던져 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이 밤에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가득 차 오르는 희망이 나를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