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학문인 사주 명리학이 오늘날까지 명맥이 유지되는 이유!
사람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안고 산다.
그 두려움의 대상 중 하나는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 때문에 생기는 막연한 불안감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딜 때, 새로운 곳을 탐험할 때 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산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사람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이겨 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해 보겠다.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주인공 로렌스는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고 사람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이겨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동지방에서 1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있었다. 함께 전투에 참전한 아랍 족장 알리는 운명을 그와 다르게 생각했다.
운명은 정해져 있고 정해진 운명대로 사람은 살아간다고.
독일과 터키에게 패해 후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 전쟁을 역전시키고 전환점을 만들려는 작전을 구상하던 로렌스와 알리 족장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길을 택해 적의 후방을 치기로 하고 부대를 이동했다.
로렌스의 아랍 부대는 사막 건너편에 있는 터키의 해안기지를 공격해야 했다.
그 사막을 건너는 일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 곳이면 붙어진 이름 속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넣었을까!.
죽음의 사막을 건너야 하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알리 족장의 부하가 낙오를 한다.
족장은 어차피 그는 운명이 다했으니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로렌스는 정해진 운명은 없다며 그를 구하러 사막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결국 로렌스는 낙오자를 구해서 돌아오고 많은 아랍인들의 환호를 받는다.
영국인이고 이방인인 그를 진심으로 아랍의 지도자로, 독립 전쟁의 지휘자로 인정하고 그들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공격 전날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고질적인 부족 간의 다툼에 사람이 죽었다.
살인자는 다름 아닌 로렌스가 구해낸 바로 그자였다. 여러 부족이 연합했던 공격 부대는 그 살인자의 처벌을 놓고 적전분열이 일어났다.
모처럼의 단결된 마음으로 압제자 터키를 몰아내고 공격에 승리하려든 일이 무산될 위기에 빠졌다.
순간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닌 로렌스는 그가 구해낸 살인자를 즉결처분한다. 각 부족의 불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그를 위로하던 족장 알리는 정해진 운명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던 영국인 로렌스의 혼란한 표정, 그리고 스스로가 죽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장면은 바뀐다.
정해진 운명!
운명론을 맹신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과 자연은 정해진 어떤 규칙 속에서 움직인다.
인간은 탐욕스러운 동물이다. 잉여 자산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생에 대한 질긴 애착이 있다.
재물을 얻고 싶은 욕망, 삶에 대한 질긴 미련에 아프고 병들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종족의 번식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자손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궁금하게 생각한다.
미래를 알고자 했던 인간의 마음은 고대나 현대나 오늘날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뭐 점이나 미신에 의지 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삶을 예측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생겨났다.
오행이니 명리학이니 점성술이니 타로니 하는 것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가 그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은 아닐까!
사주명리학은 철학이다.
중국 진나라의 통일 이전 시대에 나온 제자백가의 사상 중 음양 오행론이 사주명리학의 기반이다.
인간과 자연은 한 몸이었다. 자연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인간도 자연처럼 꽃이 피고 지듯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삶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아무리 신이 만든 최고의 창조물인 인간이라고 해도 태양이 뜨고 지고 계절이 순환하듯 그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사람의 태어난 연월일시를 네 기둥, 여덟 글자를 풀어 대입하면 태어난 날로 개인의 일생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놀라운 신비가 숨어 있게 된다.
일반 사람도 사주를 알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자신의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 수 있다.
어째서 그럴까?
인간의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라고 말한다면 과한 표현일까?
물론 스스로 늘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강사들도 대부분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행복을 추구해야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는 어떤 광고의 CM송에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라는 음률이 반복된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의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행복에 몰입하다가 보면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 살짝 든다.
행복은 생각하는 만큼 사람의 삶에 그리 녹녹지 않다. 행복을 향해 가지만 고통의 연속에서 살고 있다.
힘들게 살고 있다.
현대에 와서의 삶은 더 복잡하고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그 때문에 사람을 지치게 한다.
상실감에 빠지고 살아가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늘 행복감에 젖어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옛 속담에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을 가지고 있다.' 하는 말이 있듯이 걱정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는 종교인 조차도 걱정을 가득 안고 산다. 다 욕심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인생이라는 게 관념적인 생각으로만 살 수 없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과 걱정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랑새라는 허상을 쫓아 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때로는 천둥 치고 태풍 부는 매일의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한다.
그 해결 방법 중에 하나가 명리학이고 그 속에 답이 있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살고 어떤 사람은 이름을 날리고 어떤 사람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희미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욕망은 자신을 유명인이나 부자나 주변에서 추앙하고 받들어 주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직업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거기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
물론 힘들고 천하고 더러운 일을 즐기라고 한다면 '너나 실컷 해라'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사주 명리학은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이다.
이 공부에 몰입했던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주를 가지고 공부를 했다. 나도 내 사주를 늘 펼쳐 보고 나의 한계를 인식한다.
너무 운명론에 치우친다고 말할지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던 영화가 각색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인공은 실존인물이다.
설명을 한 에피소드 역시 그가 겪었던 일이다. 운명이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 운명에 순응하고 살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너무나 크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한계 속에서 나의 생을 풍요롭게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뒤집어 생각해 보자.
물질만이 나의 삶의 전부일까?
인간에게는 육체와 정신이 함께 있다. 정신을 영혼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의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 삶의 평화는 정신의 평화일 수 있다.
사주 명리학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은 자신의 한계 속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몫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나를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라는 메시지를 던져 준다.
어쩌면, 그리고 감히 나는 말할 수 있다. 사주 명리학은 어떠한 수행 공부보다 더 자신을 돌아보고 바라보면서 욕망을 누르고 살 수 있는지 알려주는 학문이라고.
사주명리학은 인간학이다. 인간 스스로를 탐구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학문이다.
그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버려지지 않고 이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주명리학이 아웃사이더에 겉돌지 말고 주류 학문으로 나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자로서 나는 이학문을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배우고 익힐 것이다. 나를 가장 잘 바라보고 나를 채찍질하고 나의 욕망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