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책이 있는 곳에서 따뜻해진다

2026. 2. 2.

by 유권식

한겨울의 매서운 한파는 쉽게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밤새 얼어붙은 공기는 아침이 되어도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집 안에는 말없는 적막과 무료함이 천천히 가라앉아 있었다. 난방기의 미지근한 온기마저 답답하게 느껴질 즈음, 아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에 닿아 있었다. 이대로 하루를 흘려보내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보자는 데, 말없이 뜻이 모였다.

머릿속에는 오래전부터 머물러 있던 한 장면이 있었다. '북 카페'. 책과 커피, 그리고 사색이 함께 머무는 공간이라는 기억이 겨울날의 답답함을 밀어내는 출구처럼 떠올랐다. 오늘은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외투를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서는 순간, 얼굴을 스치는 찬 공기가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운전대를 잡기 전, 가까운 주유소에 들러 연료를 가득 채웠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긴 여행을 떠나는 듯 차분해졌다. 목적지를 설정하자 차 안에 울린 낯선 음성이 겨울빛에 잠긴 길을 열어주었다. 차량은 희미한 햇살을 밟으며 도로 위를 유영하듯 달렸다.

달리는 도중, 오후 세 시로 예정된 주식 매수 시간이 다가왔다. 일상의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또 하나의 긴장된 순간이었다. 적당한 장소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나란히 앉아 지인의 추천을 받은 모회사의 주식을 몇 주만 샀다. 숫자와 그래프, 짧은 결단이 오가는 그 순간은 묘하게도 삶의 다른 국면처럼 느껴졌다. 여행과 투자, 사색과 현실이 한 장면 안에 겹쳐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다시 차를 몰아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 동안, 매서운 바람은 유리창 너머에서 쉼 없이 스쳐 갔다. 그 바람을 가르며 어느새 '북 카페'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마땅한 주차 자리를 찾지 못해, 근처 행정복지센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겨울의 숨결은 다시 한 번 온몸으로 밀려왔다. 칼날 같은 바람이 볼을 스치며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북 카페'의 문을 여는 순간, 바깥의 차가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던한 감각과 차분한 기운이 어우러진 실내가 우리를 맞이했다. 과하지 않은 조명, 정돈된 책장, 나무의 결이 살아 있는 테이블들은 이곳이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도 좋은 안식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실내 한편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모두 한 톤 낮아진 듯 부드러웠다.

야외 테라스 너머로는 언양 시내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겨울빛에 잠긴 도시의 윤곽은 담담했고,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채 바라보는 풍경은 마음의 속도를 천천히 늦춰주었다. 캡슐 같은 아늑한 공간에서는 몸을 눕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치된 책들은 이 공간이 왜 ‘다비드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아내와 마주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일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좋았다. 오늘의 날씨, 지나간 일,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 차분히 오갔다. 대화가 잠시 끊기면 책꽂이로 발길을 옮겨 마음에 드는 책을 꺼냈다. 몇 페이지를 읽다 보면 다시 아내의 시선과 마주치고, 또다시 대화로 이어졌다. 그렇게 독서와 대화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흐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소중했다.

책 속의 문장들은 하나하나 마음에 스며들었다. 오래 붙잡고 음미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은 늘 부족했다. 결국 한 권을 끝까지 읽지 못한 채 책을 덮으며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그 아쉬움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책(세상을 가지고 노는 힘 유머력)을 즉석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언젠가 다시 차분히 완독할 날을 기약하며...

어느덧 해가 기울고 저녁의 기운이 스며들 무렵, 우리는 '북 카페'를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마음속에 ‘참 좋은 공간이구나’라는 생각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생각을 쉬게 하고 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장소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대화는 이어졌다. 우리가 읽은 책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그중 특히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성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이에게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울렸다. 더 높이, 더 많이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읽은 책에서는 또 다른 대목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수고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문장을 두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일상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이는 표현이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와 예절의 결을 과연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존중의 방식은 쉽게 단순화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에 앞서 마트에 들러 장을 보았다. 파김치를 담글 쪽파를 고르고, 저녁 식탁을 풍성하게 할 아구찜 재료들도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담았다. 푸성귀의 싱그러움과 바다의 향취가 섞여 오늘 하루의 끝을 따뜻하게 예고하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의 하루를 마음속에서 천천히 되짚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찾은 작은 외출, 책과 대화, 사색과 일상. 그 모든 것이 모여 소소하지만 단단한 하루를 만들었다. 성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함께 시간을 나누고 같은 문장에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아닐까. '북 카페'에서 보낸 이 겨울날의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 한켠에서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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