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만든 작은 용기(容器) 속의 텃밭

by 유권식

며칠 전,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아내와 함께 마트에서 쪽파 두 단을 사 들고 돌아왔다. 장바구니 속에서 은은한 흙냄새를 풍기던 쪽파는 이미 한 끼 식탁의 재료로 정해진 운명을 안고 있었다. 늦은 저녁, 아내는 주방 불빛 아래에서 쪽파를 다듬기 위해 밑동을 잘라냈다. 하얀 뿌리들이 소복이 쌓이자, 그저 버려질 줄 알았던 작은 생명들을 아내는 조용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플라스틱 용기에 가지런히 담아 물을 부어 넣었다. 그 순간, 아내만의 작은 텃밭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특별한 계획도, 거창한 의도도 아니었다. 다만 자연스러운 손짓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동 속에서 생명은 다시 숨을 틔우기 시작했다. 잘린 뿌리들은 물속에서 자리를 잡고, 조용히 새 잎을 준비했다. 며칠이 흐른 지금, 그 용기 속에는 푸른 기운을 머금은 쪽파가 무성히 자라 있다. 잘려 나간 줄기의 기억을 잊은 듯, 새로 돋아난 잎들은 베란다로 스며드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싱그러운 생명의 빛을 뿜어낸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 작은 텃밭이다. 밤사이 스며든 맑은 공기를 머금은 여린 잎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잎끝이 흔들리며 작은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루의 시작이 마치 축복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작은 초록빛은 말없이 하루를 응원해 주는 조용한 친구 같다.

저녁이 되어 하루의 피로가 어깨 위에 내려앉을 때면, 나는 습관처럼 그 텃밭을 들여다본다. 아침과는 또 다른 빛깔의 쪽파들이 그곳에 서 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노을빛을 받아 조금 더 깊어진 초록은 마치 하루를 잘 견뎌냈다고 위로하는 듯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평온이 그곳에 있다. 물이 고인 작은 용기일 뿐이지만, 그곳은 어느새 우리 가족에게 쉼을 건네는 작은 정원이 되었다.

그 텃밭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거실 한켠에 자리 잡은 작은 플라스틱 용기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라는 생명은 집 안의 공기를 바꾸어 놓는다. 아침마다 물이 줄어들었는지 살펴보고, 부족하면 채워주며 잎을 어루만진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때로는 잎이 더 자란 것을 발견하고 서로를 부른다. “이거, 어제보다 더 자랐네.” 그 짧은 한마디가 집 안에 미소가 번진다.

자녀들이 어릴 적, 베란다 화분에 대파를 심어 키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우리는 작은 잎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고, 어느 날은 그 대파를 잘라 식탁에 올리며 서로를 칭찬했다. 세월은 흘러 자녀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흙과 물을 머금은 초록을 바라보며 느끼는 기쁨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잘라낸 뿌리에서 다시 싹이 돋아난다는 사실은, 삶이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버려질 운명이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 푸른 잎을 내밀고, 그 잎은 우리의 식탁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단순한 채소의 순환이 아니라, 삶의 순환을 보여주는 작은 기적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그 쪽파와 닮아 있는지 모른다. 잘려 나간 듯한 순간, 끝이라고 여겼던 자리에서 다시 싹을 틔우는 힘이 우리 안에도 숨어 있다. 상처를 입고 좌절을 겪으며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삶은 다시 시작할 길을 준비해 둔다. 물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던 쪽파처럼, 우리도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기른다.

초록빛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깊다. 쪽파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숨이 고르게 쉬어진다. 바쁜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평온이 그 초록빛 안에 담겨 있다. 자연의 색은 인간의 마음을 다독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말은 없지만, 가장 진실한 위로다.

며칠 전 저녁, 우리는 텃밭에서 자란 쪽파를 한 움큼 잘라 주방으로 가져왔다. 아내는 그 쪽파를 잘게 썰어 부침개 반죽에 넣었다. 지글지글 기름 소리가 주방을 채우고, 노릇하게 익어가는 전의 향기가 집 안에 퍼졌다. 식탁 위에 올려진 쪽파전은 평범한 음식이었지만, 그 속에는 우리 집 작은 텃밭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한입 베어 물자 향긋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거, 우리가 키운 거잖아.” 그 말 속에는 작은 자부심과 기쁨이 담겨 있었다. 용기 속에서 자란 쪽파가 식탁 위에 올라오기까지의 짧은 여정이, 그 한 접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도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작은 텃밭이 만들어 준 저녁 식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가족의 시간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선물이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삶의 기쁨이란 거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소소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작은 뿌리 하나가 물을 만나 다시 자라나듯, 우리의 일상도 그렇게 이어진다. 버려질 뻔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 생명은 또 다른 기쁨으로 이어진다. 초록빛 쪽파는 말없이 속삭인다. 삶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오늘도 아내가 만든 그 작은 텃밭에서 쪽파는 조용히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우리도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자라고 있다.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초록빛은 그 길 위에서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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