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랑일랑 Jun 05. 2017

스리라차 소스 직접 만들어보기

자취방에서 만드는 발효요리 1

직장 근처에 슈퍼가 있다.


동네 중형 슈퍼가 으레 그러하듯이 인도를 면한 바깥 매대에는 제철 채소와 과일을 그때그때 바꾸어가며 내놓아 팔고, 안으로 들어가면 냉장 코너와 과자와 식료품, 구색을 맞춘 생활용품 몇 개가 진열되어 있는 평범한 슈퍼이다. 집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유명한 재래시장이 있어서, 나는 이 슈퍼에서 파는 청과물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늘 그러하듯 슈퍼 앞을 무관심하게 지나치려던 찰나에 청과물 매대 구석에 널브러진 플라스틱 바구니가 유독 눈에 띄었다. 딸기 대야로 썼음직한 사이즈의 바구니 안에 오이 대여섯 개, 청고추와 홍고추가 들어있는 손바닥 만한 봉지가 세 봉, 청포도가 한 팩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내 시선을 이끈 것은 그 아래, 찢어진 종이조각 위에 시크하게 휘갈겨진 한 마디, "2000원."


"오오~" 나는 청포도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나직이 감탄했다. 2000원 치고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시든 포도알도 거의 없고, 그 정도면 2000원의 값어치는 충분히 할 터였다. 그대로 계산대로 걸어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거기, 밑에 것도 다 들고 가셔야 돼요!"


등 뒤에서 들리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나는 도둑질이라도 들킨 양 깜짝 놀랐다가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또 한 번 놀랐다. "이게 다 2000원이라고요?"라는 내 질문에 남자 직원은 "네~"하더니 얼굴도 마주 보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들고 갈 수 있으면 다 가져가세요~"


이게 무슨 횡재냐. 나는 영 믿기지 않아 계산대에 청포도 한 팩, 오이 여섯 개, 고추 세 봉을 올려놓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계산대 직원의 선고를 기다렸다. 직원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또한 간결하였다. "이천 원입니다."


출근용으로 가지고 온 에코백이 가득 찼다. 이천 원만 쓰기는 겸연쩍어서 가지 한 봉을 더 샀더니 가방이 너무 묵직한 나머지 허리가 아팠다.


하여간,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퇴근길에는 반드시 이 슈퍼 앞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득템을 할 때가 있다. 아주 살짝 물러진 오이가 여덟 개에 천 원을 한다거나, 표면이 아주 살짝 쪼그라든 방울토마토가 한 팩에 천 원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집에 돌아와서 전리품을 펼쳐놓고 보니, 오이나 청포도는 잘게 썰어 샐러드로 만들어먹으면 딱인데  청고추 홍고추 세 봉이 문제였다. 내 혀는 워낙 아기 혀 같아서 고추는 내 요리에 오를 일이 거의 없었다. 떡볶이집에 가서 떡볶이 양념을 물에 씻어먹는 진상이 바로 나란 사람이다. 이 녀석들을 요리에 그때그때 넣자니, 손질해서 냉동실에 넣는다고 해도 그 소진 시기가 요원하였다. 이미 냉동실에는 싸다고 한 봉 샀다가 쓰지도 않고 성에만 가득 자라 버린 홍고추가 한 봉지 그대로 있었다.


이 고추만으로 특별히 만들만한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 떠오른 것이 바로 핫소스였다. 얼마 전 홍대의 멕시칸 레스토랑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먹어본 하바네로 소스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의 사장님은 하바네로를 직접 구워서 가게에서 매일 새로 만들어내는 핫소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핫소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집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해결해야 할 고민이 하나 더 있었다. 세상의 많은 핫소스 중, 어떤 핫소스를 만들어볼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검색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지역에서 고유의 핫소스 레시피를 발전시켜 향유해왔다는 점이다. 또한 핫소스라 함은 기본적으로 고추를 주재료로 삼아야겠지만, 각 나라마다 자연환경과 식생이 다르기 때문에 부재료에서 그 나라의 취향과 식문화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1. 한국의 고추장

-재료: 고추, 쌀, 된장, 소금 등

-활용: 찐득하고 쫀쫀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떡볶이, 찌개, 쌈장, 고기 요리 등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고춧가루와 더불어 한국요리 특유의 붉은빛 일색에 기여하는 재료의 대표 격이다.


한국의 고추장 -사진 출처: kochujang.kr


2. 중국과 일본의 라유(고추기름)

-재료: 기름, 고춧가루, 향신채(파, 마늘 등)

-활용: 마파두부, 짬뽕 등 라유가 들어가는 중화요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매운맛뿐 아니라 특유의 향미도 있어 음식의 맛을 끌어올린다. 한국요리인 육개장을 만들 때도 고추기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식 중화요리를 발전시켜온 일본에서도 라유는 라멘이나 탄탄면을 만들 때 빠지지 않고 사용하는 재료였다. 가정에서의 라유 사용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당시 오키나와에서 만들어진 '타베루 라유'라는 제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중굽의 라유 -사진 출처: 나무위키

3. 태국의 남프릭

-재료: 고추, 샬럿, 마늘, 라임, 새우 페이스트나 피시소스 (토마토를 추가하는 버전도 있다)

-활용: 만들기에 따라 잼과 같은 농도일 수도 있고 멕시칸 살사처럼 질척하게 흐르는 농도일 수도 있다. 육류든 해산물이든 채소든 간에 어디에든 올려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는 소스이다.


태국의 남프릭 -사진 출처: eatingthiaifood.com


4.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스리랑카의 삼발

-재료: 기본적으로 생고추와 샬럿이 들어가지만 삼발의 종류가 하도 많아 그 재료를 일축하기가 어렵다.

-활용: 우리나라의 고기찜이나 볶음에 해당하는 요리에 양념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볶음밥에 들어가기도 하며, 아예 우리나라의 고추장이나 쌈장처럼 알아서 섞어 먹으라고 작은 종지에 따로 담아 곁들여지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는 국민 소스로 통하며, 모든 가정에는 삼발을 만들기 위한 손절구(영어로는 mortar and pestle이라고 하더라)가 있다. 어떤 삼발이든 기본적으로 이 납작한 손절구에 재료를 올려 짓이겨 눌러서 섞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1) 삼발 트라시(벨라칸)(Sambal terasi/belacan): 인도네시아에서는 삼발 트라시, 말레이시아에서는 삼발 벨라칸이라고 불린다. 고추, 토마토, 샬럿 외에 트라시(terasi)라고 불리는 발효한 새우 페이스트를 넣는다. 가장 널리 쓰이는 삼발 소스 중 하나이다.


2) 삼발 카창(Sambal kacang): 고추, 마늘, 샬럿, 설탕, 땅콩, 물을 섞어 만든다. 다양한 삼발소스 중에서 맛이 부드러운 편에 속한다.


3) 삼발 올렉(Sambal ulek (oelek)): 고추, 마늘, 생강, 레몬그라스, 식초, 라임을 섞어 만든다. 삼발소스 중에서도 시고 날카로운 맛이 특징적인 삼발이다.


인도네시아(또는 말레이시아)의 삼발 -사진 출처: indoindians.com


5. 태국과 미국(!)의 스리라차

-재료: 고추, 마늘, 설탕, 소금, 식초(주로 며칠 간의 발효과정을 거친다)

-활용: 스리라차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소스이다. 1930년에 해안 도시인 Si Racha에서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한국요리의 마지막에 참기름을 뿌리듯, 완성된 태국요리에 스리라차를 휘휘 둘러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기하게도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인지도와 인기를 얻은 소스인데, 아시아권 유래의 소스로서는 간장과 데리야키 소스에 필적하는 인기를 구가한다. 어떤 정도냐하면, 웬만한 대학교 카페테리아의 소스 트레이에는 미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케첩과 프렌치머스타드 곁에 멕시칸 핫소스 또는 스리라차 소스가 구비되어 있을 정도이다. 단,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베트남계 미국인에 의해 1980년에 만들어진 '수탉소스'이다. (병에 수탉그림이 있기 때문에 스리라차라는 이름 대신 rooster sauce라고 불릴 때가 많다)


태국의 스리라차 -사진출처: http://www.seriouseats.com Photograph by J. Kenji Lopez-Alt]


6. 포르투갈의 페리페리(피리피리) 소스

-재료: 아프리칸 버드아이칠리, 식초, 레몬, 양파, 소금

-활용: 페리페리 소스의 주재료가 되는 아프리칸버드아이칠리(스와힐리어로 피리피리)는 그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아프리카 태생의 작물이다. 포르투갈이 모잠비크 등의 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갖고 있을 무렵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로 수입되어 요리의 재료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페리페리 소스의 높은 인지도는 치킨 체인인 난도스(Nando's)의 확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난도스가 간판 메뉴인 페리페리치킨을 앞세우고 전 세계 곳곳으로 엄청나게 세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7. 멕시코와 미국 남부의 케이준 페퍼소스 (일명 타바스코 소스)

-재료: 고추(주로 카옌 페퍼를 사용하지만 하바네로나 치폴레로 만들기도 한다), 마늘, 식초, 소금

-활용: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스 중 하나. 우리가 아는 '핫소스'의 대표 격이다. 가장 잘 알려진 브랜드인 타바스코의 이름을 따서 '타바스코 소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멕시코와 미국 남부의 케이준 페퍼소스 (일명 타바스코 소스) -사진 출처: tabasco.com


8. 북아프리카의 하리사(Harissa)

-재료: 고추(로스트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쿠민, 코리앤더, 올리브 오일

-활용: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지역의 국가에서 사랑받는 핫소스이다. 고기 요리, 생선요리, 팔라펠, 수프 등 곁들이지 못할 요리가 없다.


북아프리카의 하리사 -사진 출처: bbcgoodfood.com




핫소스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나는 또 한 번 작아짐을 느꼈다. 세상의 핫소스는 이렇게 많은데 내가 알고 살았던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길다면 긴 인생, 다양한 핫소스에 도전할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 내가 도전장을 내민 핫소스는 태국과 미국(!)의 스리라차 소스이다. 미국 생활을 통해 많이 접하기도 했을뿐더러, 한국에서 막상 사려고 가격을 보면 생각보다 비싸서 차일피일 미루며 구매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것 기준으로는 만 원에 육박하는 만만치 않은 가격을 자랑하는 소스이다.


발효과정이 필요하다는 점도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발효기간이 삼일 정도로 짧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풍미가 극도로 높아진다고 한다. 상온에서 하는 발효 요리에 도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될 터였다. 자취방에서 발효라니.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살 때 할머니가 메주를 쑤고 대롱대롱 묶어서 보관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내 기억에 따르면 발효란 그렇게 고되고 숭고한 요리법이었다. 이런 손쉬운 발효 요리도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참고한 레시피]


Sriracha - Homemade Sriracha Hot Chil Sauce Recipe - Rooster Sauce

https://www.youtube.com/watch?v=vgK3EpXROks


재료. (소스 1 1/2컵 분량)


- 700g 정도의 할라페뇨 고추와 세라노 고추

(나는 마트에서 얻홍고추와 청양고추로 대신했다. 완성작에서 충분히 스리라차 소스의 맛이 났으므로 위의 고추가 없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마늘 4알

- 흑설탕 3 테이블스푼

(흑설탕이 없어 백설탕을 썼는데, 맛은 좋았으므로 흑설탕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소금 1 테이블 스푼

- 물 1/3 컵

- 식초 1/2 컵



조리법.


1) 고추의 꼭지를 자른 후, 송송 썰어 손질한다.


2) 믹서에 손질한 고추와 식초를 뺀 나머지 재료(마늘, 설탕, 소금, 물)를 넣고 곱게 간다.


3) (2)의 재료를 보관용기에 넣고 비닐랩을 씌운다. 공기를 완벽히 차단해야 한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4) (3)의 용기를 집안 어딘가 어둡고 선선한 곳에서 3일간 상온 발효시킨다.



5)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랩을 벗기고 몇 초간 잘 섞어준다.

발효과정의 부산물로 생겨난 거품이 포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루째부터 온 집안에 진한 고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6) 삼일 간의 발효 후, 재료를 믹서에 다시 넣고 식초를 넣어 아주 곱게 간다.

식초를 미리 넣지 않은 것은 식초가 발효과정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7) (6)의 재료를 체에 올리고 숟가락으로 누르며 즙을 최대한 많이 짜낸다.



8) 냄비를 불에 올려 (7)의 소스를 중불에 5분 정도 올린다. 원하는 농도가 되면 불에서 내려도 좋다. 설탕이 들어있으므로 냄비 바닥에 설탕 성분이 눌지 않도록 수시로 젓는다.



3일간의 기다림 끝에 스리라차 소스 완성!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내가 아는 스리라차소스와 같은 맛이 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만든 스리라차는 소스를 더 끈적하게 해주는 첨가물(thickening agent)가 없어서 더 묽고 가볍다는 점 정도이다.


핫소스 만들기도, 생애 처음 해 보는 발효도 막상 해보니 별로 어려운 점이 없었다. 며칠간 자취방에 발효되는 고추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그것이 고통스럽다기보다는 그날 그날 소스의 향이 얼마나 깊어졌을지 기대하는 재미가 더 컸다.


스리라차소스가 하나 생겼다고 내 요리욕구에 불이 붙었다. 스리라차 소스를 올린 베트남식 피자도, 중동의 하리사도, 인도네시아의 삼발소스도 만들어보련다. 덕심만 있다면, 자취방에서 못 만들 요리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웨덴 대사관저에서의 저녁식사와 스웨덴 요리 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