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에서 모로코 여행
지난 주말에 이사를 했다. 원룸이라는 형태는 동일해도 화장실, 부엌 합쳐 3평 남짓한 곳에서 9평 가까이 되는 큰 원룸으로 이사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방의 크기만큼이나 나의 삶의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햇빛이다.
이전 집에는 이상하게 벽지에든 화장실에든 곰팡이가 잘 끼었다. 첫번째 자취방도 한쪽 벽에는 곰팡이가 끼었기 때문에 자취방은 다들 그러겠거니하고 삼 년을 버티고 살았다.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 자취방도 있다는 것을 이번 집으로 이사를 와서야 알았다. 지난번 집과 이번 집의 가장 큰 차이점은 햇빛과 바람. 지난번 집은 고만고만한 원룸건물이 다닥다닥한 원룸촌에 있어 창문을 열면 앞 건물 5층 창문이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당연히 한창 한낮에도 집 안은 대부분 어둑어둑했다. 오늘은 날이 좀 흐리구나, 하며 대충 나갔다가 건물을 나서고서야 눈이 부심을 느끼며 선글래스를 챙기러 다시 방으로 들어간 적이 많았다. 빨래가 마르려면 어느 계절이든 최소 삼 일이 꼬박 걸렸고 그나마도 옷에서 꿉꿉한 냄새가 나서 애써 무시하고 옷장 속에 쑤셔 넣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 집은 남동향인데다 층수가 높아 저 멀리 한강까지 보일 정도이다. 오전이면 명순응이 덜 된 눈에 너무 따갑게 느껴져 불편하긴 했지만 하지만 찬란한 햇빛이 비스듬하게 집 안쪽까지 따뜻하게 들어온다. 그 정도 햇빛이면 곰팡이도 무서워서 도망가리라. 빨래도 반나절만 있으면 새하얀 햇빛에 물기가 바싹 말라서 뽀송뽀송해진다. 잘 마른 섬유 특유의 바스락거림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삼 년을 버텼을까?'하고. 이사 온 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말이다.
새 집에서 음식을 몇 번 해먹긴 했지만 요리다운 요리는 아니었다. 퇴근하고 귀찮고 출출한 가운데 끓여먹은 라면이라든가 아침식사용으로 끓인 죽 같은 생존을 위한 음식을 만들었을 뿐. 새 집에서의 첫 주말 요리는 무엇으로 만들까 고민하다 생각난 것이 바로 세비야에서 먹었던 쿠스쿠스요리였다. 곰팡이 낀 어둑어둑한 좁은 방에서 탈출하여, 스페인만큼은 아니지만 태양빛의 축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이주해 온 기념이다.
원래 가장 영감을 받았던 레시피는 '모로코식 일곱 가지 야채 쿠스쿠스(Moroccan seven-vegetable couscous)이다. 제일 큰 도움을 받았던 유튜브 동영상은 Cookingwithalia 채널의 "Couscous with Seven Vegetables"(https://www.youtube.com/watch?v=GfNRbVquluA)
찾아보니 이 요리에 들어가는 일곱 가지 야채에도 약간의 베리에이션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많은 레시피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채소를 간추려볼 수 있는데, 당근, 애호박(쥬키니), 가지, 단호박 또는 고구마, 터닙(turnip), 파프리카, 양배추, 홍고추, 이집트콩(병아리콩)이 바로 그것이다. 고기는 보통 송아지나 소고기, 양고기를 쓰는데 넣지 않고 채소의 맛만 즐기는 경우도 많은 모양이다. 유튜브의 Alia의 레시피를 보면, 시즈닝에는 소금, 후추, 양파, 터머릭, 샤프란, 생강, 생토마토가 들어간다.
내가 세비야에서 먹었던 쿠스쿠스도 아마 이것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위의 일곱가지 채소 쿠스쿠스처럼 다양한 채소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요리를 할 때 최대한 원래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중동요리를 무작정 그대로 시작하기에는 이사를 막 마친 내 찬장과 냉장고가 빈약하다. 특히 터닙이라든지, 샤프란이라든지 하는 것은 이태원 수입상가에나 가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기도 풍족하게 먹고 싶은데, 만 원 언저리로 소고기를 산다면 아마 내 두 손바닥 남짓한 크기로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 부엌의 현실에 맞추어 레시피를 재단해 보았다.
나의 준비물.
1. 쿠스쿠스류: 쿠스쿠스, 물, 소금, 버터
2. 야채류: 당근, 애호박, 가지, 양파, 마늘
3. 고기류: 아무 종류의 고기 먹고 싶은 만큼 많이
(이상적으로 소고기나 양고기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생활비가 쪼들리는 가난한 자취생은 이율배반적으로 이슬람교도가 먹지 않는 돼지 앞다리를 썼다. 이유는 고기 중에 가장 쌌기 때문. 무려 100g에 890원. 딱 1kg 정도 샀는데 비계는 미리 떼어냈으니 실제 요리한 것은 그것보다 약간 적을 것이다)
4. 시즈닝류: 파프리카 파우더, 터머릭, 세이지, 타라곤 리브즈, 딜씨드 분말, 씨겨자, 후추, 소금. 찬장에 있는 향신료를 조금이라도 이국적인 맛이 나도록 손에 잡히는대로 넣은 것이다.
요리과정.
야채와 쿠스쿠스는 조리시간이 짧은 반면, 고기는 오래도록 쪄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고기를 먼저 준비하자.
1) 고기를 손질한 후 마리네이드 한다.
고기를 시즈닝할 때에는 향신료와 허브로 고기를 문지른 다음에 올리브유를 뿌리는 것이 낫다. 그래야 고기 표면에 시즈닝이 더 밀착된다. 원래 모로코식 쿠스쿠스요리에서 핵심적인 시즈닝은 샤프란과 터머릭 파우더인데, 내 찬장에는 터머릭은 있지만 샤프란이 없다. 없으면 없는대로, 찬장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향신료나 때려넣어 이국적인 풍미가 나도록 해 본다. 내가 넣은 것은 터머릭 파우더, 파프리카 파우더, 세이지, 타라곤 리브즈, 펜넬 씨드 분말, 소금, 후추, 디죵머스타드(씨겨자)이다. 나중에 고기색이 예쁘가 나오는데 파프리카 파우더가 크게 기여했다.
2) 고기를 프라이팬에 올려 겉면을 익힌다(Brownize한다)
기본적으로 쿠스쿠스 위에 올라가는 고기는 찜의 형태이지만, 그 전에 고기를 팬에 올려 표면을 익히는 과정이 맛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고기 겉면이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이 될 때까지 익혀줌으로써 고기 특유의 감칠맛을 증폭시킨다. 브라우나이징(Brownizing)이 목적이기 떄문에, 속까지 다 익힐 필요는 없다. 겉면을 익힌 고기는 슬로우쿠커나 압력밥솥에 옮겨 담는다.
3) 팬에 붙은 맛있는 갈색을 디글레이즈(deglaze)하여 고기를 담은 솥에 넣는다.
고기를 익힌 후 팬에 눌러붙은 갈색 찌꺼기에는 고기의 육즙과 결합한 시즈닝이 잔뜩 들어있다. 가히 맛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물질이기에 녹여내어(deglaze)하여 고기솥에 옮겨 담는다. 원래 디글레이징할 때 와인을 주로 쓰는 편이지만, 오늘은 남는 와인이 없을 뿐더러 원래 레시피에 와인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레몬즙 약간과 물을 사용하여 디글레이즈했다.
4) 압력밥솥에 겉면을 익힌 고기, 디글레이즈한 것, 깍둑썰기한 양파 한 알과 편마늘 한 움큼을 넣는다. 모든 재료가 살짝 잠길 정도로 물을 더해 넣고 만능찜 기능을 이용해 찐다.
압력밥솥의 뚜껑을 닫고 만능찜 버튼을 누르기 전에 사진을 한 장 찍어두는 것을 깜빡했다!
양파와 마늘의 용도는 시즈닝으로도 잡히지 않을 고기의 누린내를 잡고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양은 취향껏 조절하면 된다. 찌는 시간도 재량껏인데, 밥솥마다 성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쿠쿠 밥솥 만능찜 기능으로 85분을 쪘는데, 고기가 아주 흐물흐물하지 않으면서도 결이 분리가 되고 부드러운 것이 딱 만족스러운 정도 였다.
5) 야채를 준비한다.
고기가 익을 동안 채소를 준비한다. 당근 하나, 애호박 하나, 가지 하나를 세로로는 10cm이하, 가로로는 4등분하여 자른다. 가지껍질은 감자껍질 깎는 칼을 이용하여 일부러 벗겼는데 혹시라도 가지껍질의 보라색 색소가 고기색을 변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6) 단단한 채소(당근과 같은 뿌리채소)를 압력밥솥에 넣고 15분간 익힌다.
드디어 85분이 지났다. 고기는 부들부들하게 잘 익어 있고,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가 증기를 타고 온 방 안에 퍼져나간다. 고기가 다 익었으니, 그 위에 준비한 채소를 넣고 더 익히면 된다. 단단한 채소(당근)-연한 채소(애호박, 가지)순으로 압력 밥솥에 넣는다.
7) 당근이 부드럽게 익으면 연한 채소(가지, 애호박 등)을 넣고 10분간 더 찐다.
8) 채소가 밥솥에서 익을 동안, 쿠스쿠스를 준비한다.
3인분(쿠스쿠스 250g)을 기준으로 물 1/4L, 소금 한 티스푼, 올리브유 한 티스푼을 넣고 끓인다.
물이 끓으면 쿠스쿠스 250g을 넣고 2분간 익힌다. 눌거나 뭉치치 않게 잘 저어 준다.
2분만에 쿠스쿠스가 물기를 흡수하여 부피가 커졌을 것이다. 버터 3 티스푼 정도를 넣고 아주 약한 불에서 3분간 더 익혀준다. 이때, 포크 등을 이용하여 쿠스쿠스가 덩어리 지지 않도록 잘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바닥이 눌을 것 같으면 물을 아주 약간씩 더해준다. 맛을 보고 필요하면 소금간을 더해도 된다.
9) 큰 접시에 쿠스쿠스를 올리고, 채소, 고기를 올려 담는다.
쿠스쿠스를 담을 때는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되도록 살짝 눌러준다. 고기를 담은 자리이다. 가장자리를 둘러가며 익은 야채를 색깔별로 담고, 가운데에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를 푸짐하게 올려준다.
남은 국물은 따로 작은 그릇에 담아두었다가 쿠스쿠스 위에 뿌려먹으면 더 맛있다.
향신료 향이 진동을 하고, 고기는 부드럽고, 야채는 달콤하고 국물은 풍미가 진하고 쿠스쿠스는 포슬하고 심심하니 고기와 먹을 때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Bon Appet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