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에서 이탈리아 볼로냐 여행
미트소스, 볼로네즈 소스, 볼로네제 소스라는 말은 이전부터 많이 들어보았지만, 라구(Ragu)라는 용어를 알게 된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미트소스라하면 병조림 또는 급식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고급스럽다거나 이국적인 느낌을 들지 않는다. 병조림 소스를 들이부은 급식 스파게티의 새콤하면서도 달콤끈적한 자극적이고 가벼운 맛이 떠오를 뿐.
볼로네제 소스라 하면, 미트소스보다는 더 오리지날에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기가 가루가 되어 뿌려져 있다시피한 미트소스보다는 고기 알갱이가 더 풍족하게 들어있을 것 같고, 뭔가 더 이탈리아 음식 같게 들린다. 다만 미트소스 대신 볼로네제라는 좀더 있어보이는 이름을 선택한 시판 인스턴트 요리들이 미트소스 요리보다 탁월하게 더 맛있을 것 같지는 않다.
파스타 위에 오르는 빨간 고기소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위의 미트소스, 볼로네제 소스하는 얄팍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되어 전체글을 정독하게 된 유명한 요리 블로거의 글에서, 나는 라구(Ragu) 소스를 알게 되었다.
위키피디아 등의 설명을 덧붙이면, 라구 소스는 고기가 주재료에 다진 야채가 부재료인 파스타용 소스를 일컫는 범위가 넓은 말이다. 고기는 보통 간고기(그라운드 미트)를 쓰지만 chopped meat를 쓰기도 하며, 토마토를 넣기도, 넣지 않기도 한다. 토마토를 넣지 않아 색이 붉지 않은 라구 소스는 화이트 라구(Ragu bianco)라고도 불린다. 라구 소스의 가장 대표격 중 하나가 바로 소고기, 다진 채소, 토마토를 넣고 뭉근히 끓여낸 볼로네제 소스이다. 이 볼로네제 소스가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 고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미트 소스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라구가 범위가 넓은 용어인만큼 미트소스나 라구 소스나 그것이 그것 아닌가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엄연히 미국의 미트 소스와 이탈리아의 라구 소스는 다른 소스이다. 그 차이는 준비 시간과 단계의 복잡성에 있다. 예를 들어 미트 소스는 20분 만에 완성할 수 있지만, 볼로네제 라구는 20분 만에 완성할 수 없다. 또한 미트 소스는 한 냄비에 야채와 고기, 토마토를 동시에 부어넣고 끓여낼 수 있지만 볼로네제 라구는 그래서는 안된다. "~라구"라는 메뉴를 내놓을 정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면 대학가 앞의 분위기만 그럴싸한 식당보다 정통 이탈리안에 가까운 요리를 낼 가능성이 높고, 그 소스는 레스토랑의 부엌에서 직접 오랜 시간 끓여냈을 가능성이 백이면 구십구이다.
내가 존경하는 블로거는, 제대로 된 라구소스를 끓이기 위해 어느 하루 밤을 꼬박 바쳐 14 동안 소스를 끓여냈다고 했다. 도대체 그 맛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압구정이나 청담 등지의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큰 맘 먹고 라구 파스타를 시켜 먹어보기 전에, 나의 자취방에서 먼저 라구소스를 만나보고 싶었다. 자취인의 주머니 사정에 황송한 소고기를 무려 두 팩이나 사서, 라구 소스 만들기에 도전해 보았다. 오랜만에 간고기를 사는 김에 동글동글 미트볼도 만들어보기로 했다.
재료.
야채류: 샐러리, 당근, 양파
허브류: 오레가노, 바질, 월계수 잎
시즈닝류: 치킨 스톡, 후추, 소금
고기류: 다진 소고기 많이 많이
파스타: 넓은 면 파스타(탈리아텔레 등) 또는 숏파스타
그리고,
레드 와인 많이 많이 (최소 1병)
1) 샐러리, 당근, 양파는 잘게 다져서 올리브유를 두르고 볶듯이 따로 익힌다.
야채를 미리 따로 볶아내는 이유는 불필요한 수분을 날려버리기 위해서이다.
야채를 잘게 다지는 것은 소스의 메인이 고기이지 야채가 아니기 때문. 고기의 맛과 질감이 우선이지, 저 야채들이 볼로네제 소스에서 도도히 튀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익히면 물러지는샐러리와 양파는 그렇다치고, 단단한 당근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잘게 다져야 한다. 칼질이 서툰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 저 정도. 아주 잘게 다져야 하는 만큼 실제로 전문 요리사 중 일부는 푸드 프로세서를 이용해 저 야채들을 갈다시피 다져내기도 한다.
나는 미트볼도 만들 예정이기 때문에, 저 야채 중 한 움큼을 미트볼용으로 따로 덜어두었다.
2) 고기를 바싹 볶아 수분을 날리고 맛있는 갈색을 많이 많이 뽑아낸다.
인간이 고기를 불에 익혀 먹게 된 이후로 인간은 고기 표면의 먹음직스러운 갈색을 사랑하게 되었다. 단순히 그 색이 먹음직스러울 뿐 아니라, 갈색으로 표면이 익은 고기는 삶은 고기의 밍밍함에 비해 그 풍미가 일품이다. 여기에는 마이야르 반응이라는 화학적인 변화가 작용한다고 한다.
라구 소스의 핵심 또한 바로 이 화학반응의 결과물을 최대한 많이 뽑아내서 활용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고기는 태우는 듯하지만 태우지는 않되 최대한 바싹바싹 익혀낸다.
존경하는 블로거님은 고기가 아예 짙은 갈색 가루가 될 때까지 볶아내셨는데...
나는 고작 이 정도에서 인내력에 한계가 온다. 한 30분 볶았으려나...
그래,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욕심을 접는다.
2) 바싹 볶아낸 고기는 소스냄비에 야채와 함께 담아 두고, 프라이팬에 눌러붙은 맛있는 갈색은 레드와인으로 녹여내어(deglaze)하여 소스냄비에 더해 넣는다.
저 맛있는 갈색이 맛의 핵심!
3) 채소와 고기를 담은 소스냄비에 와인을 더 붓고, 치킨 스톡을 넣어 끓인다.
4) 계속 끓인다.
오래 끓일 수록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내가 존경하는 블로거님은 고기가 혀에 올리면 스스로 녹아내릴 때까지 끓이셨다고 한다. 수분이 증발해서 자작해질 때마다, 치킨스톡물 또는 레드 와인을 추가하여 계속 끓인다.
5) 소스를 충분히 (최소 30분 이상) 끓였으면, 토마토 소스를 넣어 끓인다.
생토마토를 다져서 넣어도 되고 토마토 소스캔을 따서 부어도 되지만, 나는 토마토 퓨레가 집에 있어서 퓨레를 넣었다. 토마토 퓨레를 사용한다면, 아무래도 퓨레가 뻑뻑하기 때문에 물을 추가해야 한다.
월계수 잎, 오레가노, 바질과 같은 허브류도 이때 넣는다. 너무 일찍부터 넣으면 그 향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
어느 정도 농도가 나오겠다 싶을 때 소금과 후추로 간 한다. 불을 끄기 전 최종적으로 다시 간을 보고 소금간을 더하면 좋다.
6) 미트볼은 다진 고기와 채소를 섞어 동글동글 뭉친다.
미트볼은 채소 없이 고기로만 만들어도 된다.
하지만 채소를 넣어 뭉쳐낼 것이라면 꼭 채소를 미리 볶아서 수분을 날려주어야 한다.
소금, 후추로 간을 한 후 뭉친다.
7)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미트볼을 노릇노릇하게 굴려가며 익힌다.
8) 냄비에 파스타를 삶고, 파스타가 거의 다 익으면 건져내서 미리 만든 라구 소스와 섞는다.
2분 정도 저어가며 익혀서 잘 섞이게 한다.
완성된 수제 미트볼 볼로네제 라구 파스타.
야채와 함께 푹 익혀 누린내는 사라졌지만 고기향이 깊다.
당근, 샐러리, 양파의 조화는 고기의 향과 어울려 그 특유의 푸근한 향을 만들어 낸다.
고기 알갱이는 혀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혀로 바스라뜨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드럽다.
신선한 고기를 단단하게 뭉쳐 노릇노릇하게 익혀낸 미트볼이야 맛있을 수 밖에 없다.
Buon Appetito!